■ 열혈 재상, 김육 8편
■ 열혈 재상, 김육 8편
김육은 스스로의 생활에 대하여 엄격하고 철저하였으며, 우의정이 된 71살까지 한성에 집 한 칸 없이 살 정도로 청렴결백하였다. 김육은 황희나 류성룡, 이원익이나 채제공 등과 더불어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으로 손꼽힌다. 그는 절대 굴하지 않는 강한 추진력으로 유명했다. 대동법 시행에 있어 그는 반대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일관된 정책을 수행해 나아갔으며, 화폐 유통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굽힘 없는 강한 추진력과 고집이야말로 김육의 최대 장점이라고 할 수 있으나, 종종 \한 가지를 고집하는 병통\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를 깊이 신임한 효종도 가끔 "죽을 때까지 못 고칠 병"이라 했다.
"1658년 말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효종은 특별히 어의와 유명 의사를 보내 그를 진료하게 하였으나, 잠곡은 그해 9월 한성부 회현방 자택에서 별세한다. 향년 79세. 마지막 순간까지 김육은 호남 대동법을 걱정했으며, 효종에게는 대동법의 실무를 맡게 될 신임 호남 감사 서필원을 격려해달라고 청했다. 그의 부음 소식을 접한 효종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효종은 5일간 조회를 보지 않았고 무척 슬퍼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대동법이 호남지방에 확대 시행되는걸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열정은 헛되지 않았다. 이후 그의 유지를 이은 전라감사 서필원(徐必遠)의 노력으로 대동법은 그의 사후 전라도 각지로 확산되었다. 어느새 대동법의 시행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들이 크게 불어나 있었고, 송시열조차도 대동법의 효력에 동의할 정도였다.
", "대동법의 시행에 덕을 본 충청도 백성들은 충청도에 통문(通文“통지문)을 돌리고, 부의(賻儀)하려고 했던 돈으로 비석을 세웠는데, 그것이 현재 평택에 있는 대동법 시행 기념비이다. 이는 이경석이 쓴 김육의 신도비(神道碑) 문에서도 나타난다. 그만큼 그는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 "또한 그는 정책적 반대파들이 사(私)적인 원수지간이 되지 않게끔 신중하게 처신했다. 김집이나 김상헌 등 대동법과 관련하여 그와 충돌했던 인사들은 김육과 개인적으로는 술도 같이 마시던 친한 친구의 형(김집)이거나, 아버지의 비문도 써주고 스승으로 여기던 존경스러운 이웃동네 선배(김상헌)였다. 또한 김육이 강하게 정치적으로 견제했던 원두표는 당시 권세가 매우 강력한 인조반정 공신이었다. 이런 반대파들과 정책 측면에서의 대립을 넘어 정치적 정적(政敵)이 되거나 개인적인 적이 되어버린다면, 김육이 추진하던 각종 정책뿐 아니라 그 개인의 신상까지도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때문에 김육은 항상 이들과의 관계에 신경을 썼다. 김집과의 관계는 김집이 대범하게 처신하여 원활하게 유지되었으며, 김상헌과의 관계도 크게 나빠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원두표를 여러 차례 정치적으로 공격하여 그가 대동법과 관련된 사무에 있지 못하게 막았지만, 그와 동시에 원두표의 할아버지인 원호(元豪)를 추증하는 사당을 세워줄 것을 건의하는 등 원두표를 배려해 주기도 했다. 즉 김육은 정치적 반대파들을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반대파로만 대했을 뿐, 그들과 개인적인 원수는 되지 않게끔 관계를 좋게 유지하는 신중한 처신을 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