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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4일 목요일

열혈 재상, 김육 8편

■ 열혈 재상, 김육 8편

■ 열혈 재상, 김육 8편

김육은 스스로의 생활에 대하여 엄격하고 철저하였으며, 우의정이 된 71살까지 한성에 집 한 칸 없이 살 정도로 청렴결백하였다. 김육은 황희나 류성룡, 이원익이나 채제공 등과 더불어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으로 손꼽힌다. 그는 절대 굴하지 않는 강한 추진력으로 유명했다. 대동법 시행에 있어 그는 반대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일관된 정책을 수행해 나아갔으며, 화폐 유통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굽힘 없는 강한 추진력과 고집이야말로 김육의 최대 장점이라고 할 수 있으나, 종종 \한 가지를 고집하는 병통\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를 깊이 신임한 효종도 가끔 "죽을 때까지 못 고칠 병"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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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년 말 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효종은 특별히 어의와 유명 의사를 보내 그를 진료하게 하였으나, 잠곡은 그해 9월 한성부 회현방 자택에서 별세한다. 향년 79세. 마지막 순간까지 김육은 호남 대동법을 걱정했으며, 효종에게는 대동법의 실무를 맡게 될 신임 호남 감사 서필원을 격려해달라고 청했다. 그의 부음 소식을 접한 효종은 탄식하며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효종은 5일간 조회를 보지 않았고 무척 슬퍼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대동법이 호남지방에 확대 시행되는걸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열정은 헛되지 않았다. 이후 그의 유지를 이은 전라감사 서필원(徐必遠)의 노력으로 대동법은 그의 사후 전라도 각지로 확산되었다. 어느새 대동법의 시행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들이 크게 불어나 있었고, 송시열조차도 대동법의 효력에 동의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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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의 시행에 덕을 본 충청도 백성들은 충청도에 통문(通文“통지문)을 돌리고, 부의(賻儀)하려고 했던 돈으로 비석을 세웠는데, 그것이 현재 평택에 있는 대동법 시행 기념비이다. 이는 이경석이 쓴 김육의 신도비(神道碑) 문에서도 나타난다. 그만큼 그는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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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정책적 반대파들이 사(私)적인 원수지간이 되지 않게끔 신중하게 처신했다. 김집이나 김상헌 등 대동법과 관련하여 그와 충돌했던 인사들은 김육과 개인적으로는 술도 같이 마시던 친한 친구의 형(김집)이거나, 아버지의 비문도 써주고 스승으로 여기던 존경스러운 이웃동네 선배(김상헌)였다. 또한 김육이 강하게 정치적으로 견제했던 원두표는 당시 권세가 매우 강력한 인조반정 공신이었다. 이런 반대파들과 정책 측면에서의 대립을 넘어 정치적 정적(政敵)이 되거나 개인적인 적이 되어버린다면, 김육이 추진하던 각종 정책뿐 아니라 그 개인의 신상까지도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때문에 김육은 항상 이들과의 관계에 신경을 썼다. 김집과의 관계는 김집이 대범하게 처신하여 원활하게 유지되었으며, 김상헌과의 관계도 크게 나빠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원두표를 여러 차례 정치적으로 공격하여 그가 대동법과 관련된 사무에 있지 못하게 막았지만, 그와 동시에 원두표의 할아버지인 원호(元豪)를 추증하는 사당을 세워줄 것을 건의하는 등 원두표를 배려해 주기도 했다. 즉 김육은 정치적 반대파들을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반대파로만 대했을 뿐, 그들과 개인적인 원수는 되지 않게끔 관계를 좋게 유지하는 신중한 처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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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열혈 재상, 김육 7편

■ 열혈 재상, 김육 7편

■ 열혈 재상, 김육 7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서적의 인쇄를 맡고 있던 교서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그 사이 주조해 놓았던 금속 활자가 다 없어지고 인력도 부족했다. 전란 후에 경제적인 궁핍으로 인해 금속활자를 새로 주조하지 못하고 전란 전에 나온 책들을 본떠서 목활자를 어설프게 만들어 임시로 병영인 훈련도감에서 서적을 인쇄하고 있었다. 김육은 인조와 효종에게 금속활자 제조에 대해서도 건의했다. 이후 구리로 금속활자를 제조하여 전란 후 중단되고 있던 서적 간행을 활발히 전개되었다.

효종 2년인 1651년에 실록청 총재관이 된 김육은 금속활자를 재주조하여 《인조실록》 50책의 간행과 《선조수정실록》 8책의 간행에 성공한다. 이후로 서적 간행에 힘써 개량된 목활자로 새로운 서적을 인쇄하는데 성공했고, 어쩔 수 없이 훈련도감 시설을 빌려 쓰던 것에서 벗어나 정식 주무 관청인 교서관의 기능도 되살려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밖에도 ≪황명기략(皇明紀略)≫, ≪종덕신편(種德新編)≫, ≪송도지(松都誌)≫ 등을 저술,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술들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직접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그의 활자 인쇄술 주조 사업은 아들 김좌명과 김우명이 이어받았고, 그의 자손들이 하나의 가업(家業)으로 계승하며 이어졌다. 이는 주자(鑄字)와 인쇄 사업, 책 간행의 확산에 기여한 바가 크다. 김우명의 일부 후손은 강원도 춘성에 정착하여 소설가 김유정의 선조가 된다.

많은 논란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대동법은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로 확대되었다. 김육은 더 나아가서 호남지방에까지 대동법 시행을 주창하였으나, 대신들은 상소를 올려 김육을 탄핵했다. 대동법을 시행하면 나라를 망칠 것으로 몰고 갔다. 이 상소로 인해 김육의 입지는 크게 흔들렸지만, 김육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밀어붙인다. 김육은 결국 사직하려 했지만 효종은 그를 붙잡았다. 어느덧, 김육의 고집스런 대동법 주창에 동조하는 이들이 늘어갔다. 많은 대신들이 호남, 영남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며 김육의 주장에 동조하고 나섰다. 김육은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호남 대동법에도 온 신경을 기울였다. 죽기 직전인 효종 8년(1657년) 11월 초까지 대동법에 대한 호남 각 읍의 여론 조사 결과를 취합해 직접 효종에게 보고했다. 또한 호남 대동법의 주요 쟁점인 진상 물품을 어떤 형식으로 거둘 것인가에 대해서도 자신의 주장인 경각사(중앙 관청 모두를 일컬음)가 일괄 징수하는 것으로 관철시켰다. 즉, 지방 관청 말고 중앙 관청이 직접 파견해 거둔다는 방식이다. 그러나 김육은 병세가 악화되어 영의정직을 사직하고 다시 영돈령부사로 물러났다. 그는 죽기 직전 왕에게 올린 글에서조차 효종에게 선정을 펼치고 민생을 구제할 것을 청하며, 호남의 대동법 시행을 강조하였다.

효종이 대신들에게 "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大戶)가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소민(小民)이 원망하니 그 원망은 어느 쪽이 큰가?"하고 물었다. 신하들이 "소민들의 원망이 더 큽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국왕 효종은 \그 대소를 참작하여 시행하는 것이 옳다.\라며 드디어 대동법 확대 시행령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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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열혈 재상, 김육 6편

■ 열혈 재상, 김육 6편

■ 열혈 재상, 김육 6편

대동법은 당대에 획기적인 세제 개혁이었다. 백성들의 부담이 크게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비정상적인 세제로 인해 도망치는 백성들이 줄어들게 되어 세금을 걷는 어려움도 줄어들 것이고, 재정을 튼튼히 할 수 있어 식량도 원활하게 비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대동법을 충청도에 확대 실시하자는 김육의 주장은 전국에 파란을 일으켰다. 조정 여론이 찬반양론으로 나뉘었다. 조정 내에서 김육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좌의정 조익(趙翼)과 연양군 이시백 형제 정도가 찬성했고, 이조판서 김집, 호조판서 이기조, 사헌부집의 송시열 등 대부분의 관료들은 이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김육을 공격하는 데 선두에 선 인물은 이조판서 김집이었다. 이 논쟁은 서인을 분당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대동법 시행에 찬성한 김육을 중심으로 소수당인 한당과 이를 반대하는 김집, 송시열을 중심으로 다수당인 산당으로 분당되었던 것이다. 대동법 시행에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다시피 했던 김육은 이 때문에 반대파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송시열 등은 산당 세력을 움직여 대동법을 비판하는 상소를 계속 올리게 했다. 그러나 김육은 물러서지 않았다. 김육은 1649년 11월 다시 왕에게 농촌 생활의 안정 뿐 만 아니라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해 대동법을 확대 실시할 것을 거듭 주청했다.

1650년(효종1년) 중국 사행(使行)길에 중국인들의 화폐 사용을 목격하고 귀국 후 조선 조정에 동전 유통을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받는 한편, 아랫사람을 시켜 조선의 특산물인 인삼과 비단을 마련하여 중국 동전 15만문(十五萬文)을 구입하여 평안도에 유통 시켰다. 이후에도 청나라의 동전을 구입하여 조선에 유통시켜, 물물교환 대신 화폐를 유통케 하여 정확한 액수에 거래하고, 물물교환으로 발생하는 마찰을 최소화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는 평안도, 울산 등 일부 지역에서만 부분적인 성공을 거뒀다. 현재 5만원권이 유통보다 저장 목적이 크듯, 당시 화폐를 아무리 뿌려도 유통이 잘 안됐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훗날 친손자인 김석주, 허적 등은 상평통보를 유통시키는데 성공했다. 1651년(효종 2년) 그의 적극적인 건의로 십전통보가 주조되었는데, 개성 지방의 민간인 상인을 영입하여 직접 만들어 보았다. 그는 이 과정에서 훼손여부, 강도 등을 친히 시험하고 수시로 주조과정을 감독, 관리하였다. 김육은 평소 상공업을 천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상공업이야 말로 국력을 부강케 할 근간이라 하였다. 그러나 김육은 당시 사대부들로부터 장사로 천한 이익을 취하는 자들과 얄팍한 기술로 잘난 척을 하는 소인(小人)들을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상인이나 기술자들에게 얼마나 뇌물을 받았느냐는 등의 인신공격에도 시달려야 했다.

대동법의 실시를 둘러싸고 확연히 갈라지는 이해관계 때문에 반대하는 수령, 관료, 지역 유지들 등의 반발을 잠재워야 했고, 반발을 부추기는 장사꾼들의 계략에도 대응해야 했다. 김집이 이조판서에 제수되자 송시열, 송준길 등 자신의 제자들을 출사시켰는데 이들은 김육을 공격하는 돌격대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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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 재상, 김육 5편

■ 열혈 재상, 김육 5편

■ 열혈 재상, 김육 5편

1649년(효종 1년) 효종이 즉위하자, 그는 전후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지적하고, 전후 복구와 민심 수습, 대동법 시행을 적극 건의하였다. 그해 5월 효종 즉위 초에 특별히 발탁되어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동년 9월 특진하여 의정부 우의정이 되었다. 그는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재차 사임을 요청하면서 또 다시 대동법(大同法:조선시대에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 확대 실시를 간하였다.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대하여 줄기차게 주장을 거듭한 열혈재상이었다. 결국 우의정에 제수된 김육은 간곡한 상소를 올렸다.

『신으로 하여금 나와서 회의하게 하더라도 말할 바는 이에(대동법 시행) 불과하니, 혹 쓰이게 되면 백성들의 다행이요, 만일 채택된 것이 없다면 다만 한 노망한 사람이 일을 잘못 헤아린 것이니, 그런 재상을 어디다 쓰겠습니까?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였으니, 신이 믿는 바는 오직 전하뿐입니다." 《효종실록》

이 말은 대동법을 실시하려면 자신을 쓰고 그렇지 않으면 ‘노망한 재상’으로 치부해 쓰지 말라는 말이었다. 효종이 대동법의 시행을 약속함에 따라 우의정에 취임하였으나, 조정 일각에서는 왕을 압박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김육의 반대 세력들은 이 글의 형식과 내용이 방자하다며 공격의 재료로 삼았지만 그 속마음은 대동법을 반대하는 데 있었다. 김육은 효종에게 대동법의 내용을 설명하고 이 법의 시행 여부는 오직 왕의 결단에 달려 있으니 만일 시행하지 못하겠으면 자신을 벌해달라는 강경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한편 그가 명리(名利)를 취하는 사람으로 일부 대동미 업자들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등의 각종 유언비어들이 돌면서 그를 괴롭혔다. 소문이 계속되자 효종은 한때 그를 의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육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해 옳다고 생각한 바를 끝까지 관철시키려 했을 뿐이다. 만약, 그가 현실을 무시한 탁상 행정을 밀어붙였다면 그의 강한 추진력은 그냥 옹고집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의 강한 추진력은 많은 실무 경험이 뒷받침되었기에 그 빛을 발할 수 있었다.

김육은 조정에 나섰을 때부터 주요 실무직, 특히 호패와 재정, 외교 분야와 관련된 관직을 두루 섭렵했고, 이 덕에 현장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김육은 실현 가능성이 높은 정책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하여 추진할 수 있었다. 물론 실무에 있어서는 김육도 인정하는 전문 관료들이 많이 있었고, 김육의 역할은 직접 실무를 담당하기보다는 구체적 실천에 있어서 이들과 의논하고 이들에게 맡기면서 정치적 보호를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동법의 성공 원인이 오로지 김육의 일관된 고집만이 아니라 뛰어난 능력을 갖춘 전문 관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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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열혈 재상, 김육 4편

■ 열혈 재상, 김육 4편

■ 열혈 재상, 김육 4편

병조 좌랑을 거쳐 당시 조선 관료의 꽃인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을 거친 김육은 내직에 있으면 외직을 반드시 돌아야 하는 제도 때문에 다시 음성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송덕비가 세워질 정도였다.

정묘호란 직후 다시 국토가 황폐해지자 그는 양서의 사정을 논하는 《논양서사의소:論兩西事宜疏》를 올렸다. 전쟁의 참화와 인명 피해, 흉년, 재물 손실, 각종 잡역의 부담 때문에 백성들이 전국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특히 그 피해가 심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 백성을 살리기 위해 세금 감면과 지원 등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또, 그는 전쟁 직후인 당시의 과제는 백성을 어린애 어루만지듯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구체적으로 전쟁에 지고 도망한 군졸을 용서해 주고, 그들을 성 쌓는 데로 동원하여 기력을 고갈시키지 말 것이며, 살기가 어려워 고향을 떠나는 백성을 억지로 붙잡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그 뒤로도 전후 복구와 구휼을 청하는 상소와 후금의 침략에 대비해 병력을 양성하고 변방의 성곽을 세우고, 기존의 성곽을 개보수해야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원망을 품은 백성을 안정시켜 민심을 얻은 다음 농사짓는 것과 군사 일을 분리하고(兵農分離), 비어 있는 땅에다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등 장차 오랑캐가 다시 침략할 것을 준비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느냐 여부를 놓고 찬성하는 서인 유생 및 학자들과 반대하는 남인 유생과 학자들이 올린 상소들에 묻혀서 물타기 또는 공리공담으로 취급되어 인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김육은 대동법을 실시해야 할 가장 큰 이유로 농촌 경제의 붕괴, 곧 농민 생활의 파탄을 들었다. 따라서 과중한 세금 과세를 지양하고 과세 과정의 부정을 없앨 수 있는 근본 대책으로 대동법 시행을 주장한 것이다. 김육은 중간에 방납업자들이 떼어가는 것, 관료들이 착복하는 것의 예를 들어 진상품 방납을 없애고 일원화된 세금 조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거듭된 전란으로 민생은 피폐해졌는데 방납업자들이 토호나 관료들과 짜고 무거운 세금을 요구하고, 착복한다며 이를 시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어 그는 면세(免稅) 내지는 감세(減稅)를 주장했다. 이후 그는 공납의 폐단을 없애는데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걸기도 했다.

1646년 청나라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갔을 때 베이징에 당도한 서양인 과학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시헌력(時憲曆) 사용법을 배워왔다. 시헌력은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한 양력 달력이었는데, 그는 이를 확인하고자 직접 해의 변화를 관측한 자료를 입수하기도 했다. 귀국 후 시헌력의 사용을 적극 건의하면서 직접 달의 변화와 해와 날의 길이를 통해 기후를 예측하고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했으며, 기후의 변화를 미리 예측하여 농업에도 보탬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시헌력의 사용을 적극 건의하였고, 효종 때 1653년부터 드디어 시헌력을 시행하게 되어 농업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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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열혈 재상, 김육 3편

■ 열혈 재상, 김육 3편

■ 열혈 재상, 김육 3편

성균관을 팽개치고 가평 잠곡으로 낙향한 김육은 직접 밭을 갈고 물길을 만드는 등 농부로서의 삶을 살았다. 낙향 후 2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집 1칸을 마련할 수 있었다. 산에서 직접 나무를 해다가 숯을 굽고 한양에 내다 팔아 생활했는데, 가평에서 무거운 지게를 지고 한양까지 가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새벽에 파루가 치고 도성 문이 열리면 제일 먼저 김육이 왔다고 할 정도로 부지런했다고 한다. 김육은 양반이자 성균관 유생으로서의 특권 의식도 없이 농민의 생활을 철저히 한 셈이다. 그렇게 30대를 보낸 김육이 몸소 체험한 힘든 노동과 전세, 공납, 군역을 모두 부담하는 백성으로서의 고단한 삶이 그에게 대동법을 실현시키게 했고, 현실 감각이 뒷받침이 된 정무 능력을 갖춘 관료가 되는 밑거름이 되어 전 생애를 국가 경제와 농촌 경제의 안정, 그리고 농민 생활의 향상에 바쳤다. 김육의 잠곡 생활은 10년 만에 끝이 났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의 북인 정권이 몰락하고 서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광해군이 재위하는 15년 동안 많은 관료들이 숙청됐고, 이항복, 이덕형 같은 서인, 남인의 유력인사들도 사망하거나 긴 유배로 건강을 해친 상태였으므로 반정세력들은 인재가 필요했다. 젊은 관료들을 새로 기용하는 것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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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로서 분별력까지 갖춘 김육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반정 직후, 광해군 때 귀양 간 관료나 지조와 절개가 가상한 사람(낙향자)들을 6품직에 우선 서용하고, 자리가 나는 대로 품을 올려주는 천거 인사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약 20여 명이 천거됐는데, 김육도 이 때 의금부도사(종5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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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2년(1624년) 음력 1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몽진하는 인조를 호종(護從)했고, 그 공으로 아직 반란 도중인데도 충청도 음성 현감에 임명됐다. 김육은 부임 2개월 만에 업무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공납 부담이 고을의 크기에 따라 공정하지 못하므로 행정구역을 조정하여 불균형을 완화하자는 내용이었다. 백성의 피폐하고 곤궁한 상황을 직접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백성들의 재난과 피폐한 가계 등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부역과 조세를 감면해줄 것을 제의했다. 그는 토지의 많고 적음을 참작하지 않은 과중한 세금 부과와 부과 과정의 부정을 세세히 나열하면서 제도개혁을 주장하였다. 공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다했지만, 공납 문제는 고을 현감 정도로는 해결할 수 없는 꿈이었다. 대과에 급제하지 않고는 더 이상의 힘을 가진 관료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마침 그해(1624년) 겨울 이괄의 난이 진압됨을 축하하는 증광시(增廣試:나라에 경가가 있을 때 시행되는 시험)가 열렸다. 김육은 업무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지만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에 장원으로 급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김육이 제출한 답안지는 책상머리에만 앉아있던 서생들로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내용이라 채점관이 크게 감동했다. 이렇게 갑과 장원한 덕에 고위 관료로서의 앞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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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 재상, 김육 2편

■ 열혈 재상, 김육 2편

■ 열혈 재상, 김육 2편

모친상을 마친 1603년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해 합격하고, 1604년 2차 회시(會試:복시)에도 합격해 생원(生員)이 됐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자격이 주어진 그는 27세에 윤진사의 딸 파평 윤씨와 결혼했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파평 윤씨와의 사이에서 김좌명, 김우명을 뒀는데, 장남 김좌명은 선조의 딸인 정숙 옹주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그의 아들이 우의정 김석주로 할아버지 김육의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 시행하는데 이바지했다. 차남 김우명이 은진 송씨와 결혼해 낳은 딸은 후에 현종의 비(妃) 명성왕후가 되었고, 김우명의 5대손이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이고, 동백꽃, 봄봄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유정은 김육의 10대손이다.

그는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지만 학통으로는 이황의 학통을 일부 계승하였다. 동인이었던 첫 스승 조호익이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고, 다른 스승들인 윤근수와 윤두수도 비록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지만 그들 역시 퇴계 이황의 문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학문적으로 성리학적 정통파와 중상주의 실학자 북학파 사이를 잇는 중간 고리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학풍이 그에게 대동법 시행과 같은 민생안정정책에 평생을 걸도록 했던 것 같다.

1605년(선조38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공부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1610년 3번이나 상소를 올려 이른바 오현(五賢: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문묘에 모시는 오현종사(五賢從祀)를 주장했다. 선조 때부터 사림은 오현종사를 추진하는데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운동이었다. 이는 1610년(광해군 2년) 7월에 실현을 본다.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문묘에 배향할 때 누구를 넣고 누구를 빼느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문묘에 종사된다는 것은 곧 그 인물의 학문과 도통(道統)이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음을 의미하므로, 이는 단지 학문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의 학파가 곧 정치적 집단의 모태가 되는 상황이었으므로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붕당간의 갈등이 심화되던 시기에 자파(自派) 인물의 문묘 종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 역시 자주 표출되었다.

1610년(광해군 2년) 정인홍(鄭仁弘) 등이 이황(李滉)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그는 선현을 헐뜯는다며 이에 격분하여, 정인홍의 이름을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靑襟錄)에서 삭제하는 것에 앞장서서 가담했다가 성균관에서 퇴교당했다. 이 사건으로 김육은 과거 응시 자격이 박탈되는 정거(停擧) 처분을 받았는데, 이 사건은 그 이듬해 광해군이 양보해서 오현이 문묘에 종사되고 그의 과거 응시 자격 박탈 조치가 취소되었다. 다른 퇴교학생들은 모두 성균관에 복귀했으나 그는 경기도 가평으로 내려가 끝내 복귀를 거부했다.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경기도 가평군 잠곡리(潛谷里) 고향으로 낙향, 농사를 지으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이후 그는 10여 년 동안 농촌에 파묻혀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상을 직접 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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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열혈 재상, 김육 1편

■ 열혈 재상, 김육 1편

■ 열혈 재상, 김육 1편

김육(金堉, 1580~1658)은 민생이 도탄에 빠진 난세(亂世)에 민생 안정을 위한 많은 정책을 주장하여 실현시킨 대표적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임진왜란을 겪고, 장년(長年)에는 왕이 뒤바뀌는 인조반정을 목격했으며, 늙은 나이에는 병자호란을 맞이했다. 이런 역사의 격동기(激動期) 속에서 벼슬아치로서의 역할을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해낸 인물이다. 그는 이 어려운 시기에 민중의 비참한 생활을 접하고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김육이 평생을 바친 현실 개혁은 조선이 처해있던 당시 위기 상황을 뼈저리게 간파했기 때문이다. 왜란과 호란은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고, 정부는 국가 재정을 비롯한 전후 복구 문제가 급박한 실정이었다. 전란 후 재정복구책이 절실한 상황에서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인물이 바로 김육이었다. 당시의 위정자(爲政者)들은 파탄 난 국가 재정만을 생각했지만, 김육은 그보다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김육은 조선시대에 몇 안 되는 경제 전문가이자 과학 기술자였다. 그의 정치철학의 근본은 오로지 위민(爲民) 정신에 있었고, 이를 위해서 줄기차게 특권층 철폐를 주장하였으며, 부의 편중(偏重)이 백성을 고통스럽게 할 뿐 아니라 나라도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김육(金堉:1580년 8월 23일~1658년 10월 1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실학자, 사상가, 작가, 정치가, 철학자이다. 효종과 현종 연간에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주장하고 실현시켰다. 아울러 화폐경제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화폐(동전) 보급에도 힘썼다.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회정당(晦靜堂),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그는 조광조의 동지로서 기묘사화 때 희생된 우당 김식(友堂金湜)의 4대손이었다. 그의 본가는 경기도 가평군 잠곡이었으므로, 호를 처음에 회정당이라고 했다가, 뒤에 어려서 나고 자란 마을이름을 따서 잠곡(潛谷)이라 하였다.

김육의 가족은 평구(현재 경기도 가평군 부근)를 떠나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 경기도 등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았다. 이 와중에 아버지가 1594년 4월 향년 31세로 사망하여 김육은 15세에 소년 가장이 됐다. 전쟁의 발발과 갑작스런 부친의 죽음, 연이은 흉년으로 김육은 모친을 모시고 청주에 살던 이모부 남익수의 집으로 가서 의탁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연안 지봉촌이라는 곳으로 이주했지만, 전란이 끝난 직후인 1600년 1월에 어머니를 잃었다. 당시 21세 청년이었던 김육은 평구(현재 남양주 삼패동)에 부친과 모친의 묘를 합장하였는데, 인부를 부를 돈이 없어 본인이 직접 흙과 잔디를 날라 묘역을 만들었다고 한다. 부모를 모두 잃은 뒤에는 서울에 사는 고모댁에 얹혀 살았는데, 삼년상 동안 새벽마다 묘소까지 걸어가서 곡을 하고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