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혈 재상, 김육 7편
■ 열혈 재상, 김육 7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서적의 인쇄를 맡고 있던 교서관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그 사이 주조해 놓았던 금속 활자가 다 없어지고 인력도 부족했다. 전란 후에 경제적인 궁핍으로 인해 금속활자를 새로 주조하지 못하고 전란 전에 나온 책들을 본떠서 목활자를 어설프게 만들어 임시로 병영인 훈련도감에서 서적을 인쇄하고 있었다. 김육은 인조와 효종에게 금속활자 제조에 대해서도 건의했다. 이후 구리로 금속활자를 제조하여 전란 후 중단되고 있던 서적 간행을 활발히 전개되었다.
효종 2년인 1651년에 실록청 총재관이 된 김육은 금속활자를 재주조하여 《인조실록》 50책의 간행과 《선조수정실록》 8책의 간행에 성공한다. 이후로 서적 간행에 힘써 개량된 목활자로 새로운 서적을 인쇄하는데 성공했고, 어쩔 수 없이 훈련도감 시설을 빌려 쓰던 것에서 벗어나 정식 주무 관청인 교서관의 기능도 되살려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밖에도 ≪황명기략(皇明紀略)≫, ≪종덕신편(種德新編)≫, ≪송도지(松都誌)≫ 등을 저술,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술들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직접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그의 활자 인쇄술 주조 사업은 아들 김좌명과 김우명이 이어받았고, 그의 자손들이 하나의 가업(家業)으로 계승하며 이어졌다. 이는 주자(鑄字)와 인쇄 사업, 책 간행의 확산에 기여한 바가 크다. 김우명의 일부 후손은 강원도 춘성에 정착하여 소설가 김유정의 선조가 된다.
많은 논란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대동법은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로 확대되었다. 김육은 더 나아가서 호남지방에까지 대동법 시행을 주창하였으나, 대신들은 상소를 올려 김육을 탄핵했다. 대동법을 시행하면 나라를 망칠 것으로 몰고 갔다. 이 상소로 인해 김육의 입지는 크게 흔들렸지만, 김육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밀어붙인다. 김육은 결국 사직하려 했지만 효종은 그를 붙잡았다. 어느덧, 김육의 고집스런 대동법 주창에 동조하는 이들이 늘어갔다. 많은 대신들이 호남, 영남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며 김육의 주장에 동조하고 나섰다. 김육은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호남 대동법에도 온 신경을 기울였다. 죽기 직전인 효종 8년(1657년) 11월 초까지 대동법에 대한 호남 각 읍의 여론 조사 결과를 취합해 직접 효종에게 보고했다. 또한 호남 대동법의 주요 쟁점인 진상 물품을 어떤 형식으로 거둘 것인가에 대해서도 자신의 주장인 경각사(중앙 관청 모두를 일컬음)가 일괄 징수하는 것으로 관철시켰다. 즉, 지방 관청 말고 중앙 관청이 직접 파견해 거둔다는 방식이다. 그러나 김육은 병세가 악화되어 영의정직을 사직하고 다시 영돈령부사로 물러났다. 그는 죽기 직전 왕에게 올린 글에서조차 효종에게 선정을 펼치고 민생을 구제할 것을 청하며, 호남의 대동법 시행을 강조하였다.
효종이 대신들에게 "대동법을 시행하면 대호(大戶)가 원망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소민(小民)이 원망하니 그 원망은 어느 쪽이 큰가?"하고 물었다. 신하들이 "소민들의 원망이 더 큽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국왕 효종은 \그 대소를 참작하여 시행하는 것이 옳다.\라며 드디어 대동법 확대 시행령을 내린다.
- 8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