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혈 재상, 김육 6편
■ 열혈 재상, 김육 6편
대동법은 당대에 획기적인 세제 개혁이었다. 백성들의 부담이 크게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비정상적인 세제로 인해 도망치는 백성들이 줄어들게 되어 세금을 걷는 어려움도 줄어들 것이고, 재정을 튼튼히 할 수 있어 식량도 원활하게 비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대동법을 충청도에 확대 실시하자는 김육의 주장은 전국에 파란을 일으켰다. 조정 여론이 찬반양론으로 나뉘었다. 조정 내에서 김육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소수였다. 좌의정 조익(趙翼)과 연양군 이시백 형제 정도가 찬성했고, 이조판서 김집, 호조판서 이기조, 사헌부집의 송시열 등 대부분의 관료들은 이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김육을 공격하는 데 선두에 선 인물은 이조판서 김집이었다. 이 논쟁은 서인을 분당시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대동법 시행에 찬성한 김육을 중심으로 소수당인 한당과 이를 반대하는 김집, 송시열을 중심으로 다수당인 산당으로 분당되었던 것이다. 대동법 시행에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다시피 했던 김육은 이 때문에 반대파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그리고 송시열 등은 산당 세력을 움직여 대동법을 비판하는 상소를 계속 올리게 했다. 그러나 김육은 물러서지 않았다. 김육은 1649년 11월 다시 왕에게 농촌 생활의 안정 뿐 만 아니라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기 위해 대동법을 확대 실시할 것을 거듭 주청했다.
1650년(효종1년) 중국 사행(使行)길에 중국인들의 화폐 사용을 목격하고 귀국 후 조선 조정에 동전 유통을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받는 한편, 아랫사람을 시켜 조선의 특산물인 인삼과 비단을 마련하여 중국 동전 15만문(十五萬文)을 구입하여 평안도에 유통 시켰다. 이후에도 청나라의 동전을 구입하여 조선에 유통시켜, 물물교환 대신 화폐를 유통케 하여 정확한 액수에 거래하고, 물물교환으로 발생하는 마찰을 최소화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는 평안도, 울산 등 일부 지역에서만 부분적인 성공을 거뒀다. 현재 5만원권이 유통보다 저장 목적이 크듯, 당시 화폐를 아무리 뿌려도 유통이 잘 안됐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훗날 친손자인 김석주, 허적 등은 상평통보를 유통시키는데 성공했다. 1651년(효종 2년) 그의 적극적인 건의로 십전통보가 주조되었는데, 개성 지방의 민간인 상인을 영입하여 직접 만들어 보았다. 그는 이 과정에서 훼손여부, 강도 등을 친히 시험하고 수시로 주조과정을 감독, 관리하였다. 김육은 평소 상공업을 천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상공업이야 말로 국력을 부강케 할 근간이라 하였다. 그러나 김육은 당시 사대부들로부터 장사로 천한 이익을 취하는 자들과 얄팍한 기술로 잘난 척을 하는 소인(小人)들을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상인이나 기술자들에게 얼마나 뇌물을 받았느냐는 등의 인신공격에도 시달려야 했다.
대동법의 실시를 둘러싸고 확연히 갈라지는 이해관계 때문에 반대하는 수령, 관료, 지역 유지들 등의 반발을 잠재워야 했고, 반발을 부추기는 장사꾼들의 계략에도 대응해야 했다. 김집이 이조판서에 제수되자 송시열, 송준길 등 자신의 제자들을 출사시켰는데 이들은 김육을 공격하는 돌격대 역할을 하였다.
- 7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