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4일 목요일

열혈 재상, 김육 3편

■ 열혈 재상, 김육 3편

■ 열혈 재상, 김육 3편

성균관을 팽개치고 가평 잠곡으로 낙향한 김육은 직접 밭을 갈고 물길을 만드는 등 농부로서의 삶을 살았다. 낙향 후 2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집 1칸을 마련할 수 있었다. 산에서 직접 나무를 해다가 숯을 굽고 한양에 내다 팔아 생활했는데, 가평에서 무거운 지게를 지고 한양까지 가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새벽에 파루가 치고 도성 문이 열리면 제일 먼저 김육이 왔다고 할 정도로 부지런했다고 한다. 김육은 양반이자 성균관 유생으로서의 특권 의식도 없이 농민의 생활을 철저히 한 셈이다. 그렇게 30대를 보낸 김육이 몸소 체험한 힘든 노동과 전세, 공납, 군역을 모두 부담하는 백성으로서의 고단한 삶이 그에게 대동법을 실현시키게 했고, 현실 감각이 뒷받침이 된 정무 능력을 갖춘 관료가 되는 밑거름이 되어 전 생애를 국가 경제와 농촌 경제의 안정, 그리고 농민 생활의 향상에 바쳤다. 김육의 잠곡 생활은 10년 만에 끝이 났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의 북인 정권이 몰락하고 서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광해군이 재위하는 15년 동안 많은 관료들이 숙청됐고, 이항복, 이덕형 같은 서인, 남인의 유력인사들도 사망하거나 긴 유배로 건강을 해친 상태였으므로 반정세력들은 인재가 필요했다. 젊은 관료들을 새로 기용하는 것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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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로서 분별력까지 갖춘 김육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반정 직후, 광해군 때 귀양 간 관료나 지조와 절개가 가상한 사람(낙향자)들을 6품직에 우선 서용하고, 자리가 나는 대로 품을 올려주는 천거 인사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약 20여 명이 천거됐는데, 김육도 이 때 의금부도사(종5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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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2년(1624년) 음력 1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몽진하는 인조를 호종(護從)했고, 그 공으로 아직 반란 도중인데도 충청도 음성 현감에 임명됐다. 김육은 부임 2개월 만에 업무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공납 부담이 고을의 크기에 따라 공정하지 못하므로 행정구역을 조정하여 불균형을 완화하자는 내용이었다. 백성의 피폐하고 곤궁한 상황을 직접 조사하여 보고서를 작성하고, 백성들의 재난과 피폐한 가계 등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부역과 조세를 감면해줄 것을 제의했다. 그는 토지의 많고 적음을 참작하지 않은 과중한 세금 부과와 부과 과정의 부정을 세세히 나열하면서 제도개혁을 주장하였다. 공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다했지만, 공납 문제는 고을 현감 정도로는 해결할 수 없는 꿈이었다. 대과에 급제하지 않고는 더 이상의 힘을 가진 관료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마침 그해(1624년) 겨울 이괄의 난이 진압됨을 축하하는 증광시(增廣試:나라에 경가가 있을 때 시행되는 시험)가 열렸다. 김육은 업무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없었지만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에 장원으로 급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김육이 제출한 답안지는 책상머리에만 앉아있던 서생들로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내용이라 채점관이 크게 감동했다. 이렇게 갑과 장원한 덕에 고위 관료로서의 앞길이 열렸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