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4일 목요일

열혈 재상, 김육 2편

■ 열혈 재상, 김육 2편

■ 열혈 재상, 김육 2편

모친상을 마친 1603년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해 합격하고, 1604년 2차 회시(會試:복시)에도 합격해 생원(生員)이 됐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자격이 주어진 그는 27세에 윤진사의 딸 파평 윤씨와 결혼했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파평 윤씨와의 사이에서 김좌명, 김우명을 뒀는데, 장남 김좌명은 선조의 딸인 정숙 옹주의 딸에게 장가를 갔다. 그의 아들이 우의정 김석주로 할아버지 김육의 대동법을 전국으로 확대 시행하는데 이바지했다. 차남 김우명이 은진 송씨와 결혼해 낳은 딸은 후에 현종의 비(妃) 명성왕후가 되었고, 김우명의 5대손이 정조의 정비인 효의왕후이고, 동백꽃, 봄봄으로 유명한 소설가 김유정은 김육의 10대손이다.

그는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지만 학통으로는 이황의 학통을 일부 계승하였다. 동인이었던 첫 스승 조호익이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고, 다른 스승들인 윤근수와 윤두수도 비록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지만 그들 역시 퇴계 이황의 문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학문적으로 성리학적 정통파와 중상주의 실학자 북학파 사이를 잇는 중간 고리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그의 학풍이 그에게 대동법 시행과 같은 민생안정정책에 평생을 걸도록 했던 것 같다.

1605년(선조38년)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여 성균관 유생으로 공부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1610년 3번이나 상소를 올려 이른바 오현(五賢: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문묘에 모시는 오현종사(五賢從祀)를 주장했다. 선조 때부터 사림은 오현종사를 추진하는데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운동이었다. 이는 1610년(광해군 2년) 7월에 실현을 본다.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문묘에 배향할 때 누구를 넣고 누구를 빼느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심했기 때문이었다. 문묘에 종사된다는 것은 곧 그 인물의 학문과 도통(道統)이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음을 의미하므로, 이는 단지 학문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의 학파가 곧 정치적 집단의 모태가 되는 상황이었으므로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문제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붕당간의 갈등이 심화되던 시기에 자파(自派) 인물의 문묘 종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 역시 자주 표출되었다.

1610년(광해군 2년) 정인홍(鄭仁弘) 등이 이황(李滉)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그는 선현을 헐뜯는다며 이에 격분하여, 정인홍의 이름을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靑襟錄)에서 삭제하는 것에 앞장서서 가담했다가 성균관에서 퇴교당했다. 이 사건으로 김육은 과거 응시 자격이 박탈되는 정거(停擧) 처분을 받았는데, 이 사건은 그 이듬해 광해군이 양보해서 오현이 문묘에 종사되고 그의 과거 응시 자격 박탈 조치가 취소되었다. 다른 퇴교학생들은 모두 성균관에 복귀했으나 그는 경기도 가평으로 내려가 끝내 복귀를 거부했다.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경기도 가평군 잠곡리(潛谷里) 고향으로 낙향, 농사를 지으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이후 그는 10여 년 동안 농촌에 파묻혀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상을 직접 목격하였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