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혈 재상, 김육 4편
■ 열혈 재상, 김육 4편
병조 좌랑을 거쳐 당시 조선 관료의 꽃인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을 거친 김육은 내직에 있으면 외직을 반드시 돌아야 하는 제도 때문에 다시 음성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송덕비가 세워질 정도였다.
정묘호란 직후 다시 국토가 황폐해지자 그는 양서의 사정을 논하는 《논양서사의소:論兩西事宜疏》를 올렸다. 전쟁의 참화와 인명 피해, 흉년, 재물 손실, 각종 잡역의 부담 때문에 백성들이 전국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특히 그 피해가 심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 백성을 살리기 위해 세금 감면과 지원 등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또, 그는 전쟁 직후인 당시의 과제는 백성을 어린애 어루만지듯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구체적으로 전쟁에 지고 도망한 군졸을 용서해 주고, 그들을 성 쌓는 데로 동원하여 기력을 고갈시키지 말 것이며, 살기가 어려워 고향을 떠나는 백성을 억지로 붙잡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그 뒤로도 전후 복구와 구휼을 청하는 상소와 후금의 침략에 대비해 병력을 양성하고 변방의 성곽을 세우고, 기존의 성곽을 개보수해야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원망을 품은 백성을 안정시켜 민심을 얻은 다음 농사짓는 것과 군사 일을 분리하고(兵農分離), 비어 있는 땅에다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등 장차 오랑캐가 다시 침략할 것을 준비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느냐 여부를 놓고 찬성하는 서인 유생 및 학자들과 반대하는 남인 유생과 학자들이 올린 상소들에 묻혀서 물타기 또는 공리공담으로 취급되어 인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김육은 대동법을 실시해야 할 가장 큰 이유로 농촌 경제의 붕괴, 곧 농민 생활의 파탄을 들었다. 따라서 과중한 세금 과세를 지양하고 과세 과정의 부정을 없앨 수 있는 근본 대책으로 대동법 시행을 주장한 것이다. 김육은 중간에 방납업자들이 떼어가는 것, 관료들이 착복하는 것의 예를 들어 진상품 방납을 없애고 일원화된 세금 조달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거듭된 전란으로 민생은 피폐해졌는데 방납업자들이 토호나 관료들과 짜고 무거운 세금을 요구하고, 착복한다며 이를 시정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어 그는 면세(免稅) 내지는 감세(減稅)를 주장했다. 이후 그는 공납의 폐단을 없애는데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걸기도 했다.
1646년 청나라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북경에 갔을 때 베이징에 당도한 서양인 과학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시헌력(時憲曆) 사용법을 배워왔다. 시헌력은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한 양력 달력이었는데, 그는 이를 확인하고자 직접 해의 변화를 관측한 자료를 입수하기도 했다. 귀국 후 시헌력의 사용을 적극 건의하면서 직접 달의 변화와 해와 날의 길이를 통해 기후를 예측하고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했으며, 기후의 변화를 미리 예측하여 농업에도 보탬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시헌력의 사용을 적극 건의하였고, 효종 때 1653년부터 드디어 시헌력을 시행하게 되어 농업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