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혈 재상, 김육 1편
■ 열혈 재상, 김육 1편
김육(金堉, 1580~1658)은 민생이 도탄에 빠진 난세(亂世)에 민생 안정을 위한 많은 정책을 주장하여 실현시킨 대표적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임진왜란을 겪고, 장년(長年)에는 왕이 뒤바뀌는 인조반정을 목격했으며, 늙은 나이에는 병자호란을 맞이했다. 이런 역사의 격동기(激動期) 속에서 벼슬아치로서의 역할을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해낸 인물이다. 그는 이 어려운 시기에 민중의 비참한 생활을 접하고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를 고민했다. 김육이 평생을 바친 현실 개혁은 조선이 처해있던 당시 위기 상황을 뼈저리게 간파했기 때문이다. 왜란과 호란은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고, 정부는 국가 재정을 비롯한 전후 복구 문제가 급박한 실정이었다. 전란 후 재정복구책이 절실한 상황에서 가장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인물이 바로 김육이었다. 당시의 위정자(爲政者)들은 파탄 난 국가 재정만을 생각했지만, 김육은 그보다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김육은 조선시대에 몇 안 되는 경제 전문가이자 과학 기술자였다. 그의 정치철학의 근본은 오로지 위민(爲民) 정신에 있었고, 이를 위해서 줄기차게 특권층 철폐를 주장하였으며, 부의 편중(偏重)이 백성을 고통스럽게 할 뿐 아니라 나라도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했다.
김육(金堉:1580년 8월 23일~1658년 10월 1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실학자, 사상가, 작가, 정치가, 철학자이다. 효종과 현종 연간에 대동법의 확대 시행을 주장하고 실현시켰다. 아울러 화폐경제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화폐(동전) 보급에도 힘썼다.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회정당(晦靜堂),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그는 조광조의 동지로서 기묘사화 때 희생된 우당 김식(友堂金湜)의 4대손이었다. 그의 본가는 경기도 가평군 잠곡이었으므로, 호를 처음에 회정당이라고 했다가, 뒤에 어려서 나고 자란 마을이름을 따서 잠곡(潛谷)이라 하였다.
김육의 가족은 평구(현재 경기도 가평군 부근)를 떠나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 경기도 등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았다. 이 와중에 아버지가 1594년 4월 향년 31세로 사망하여 김육은 15세에 소년 가장이 됐다. 전쟁의 발발과 갑작스런 부친의 죽음, 연이은 흉년으로 김육은 모친을 모시고 청주에 살던 이모부 남익수의 집으로 가서 의탁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연안 지봉촌이라는 곳으로 이주했지만, 전란이 끝난 직후인 1600년 1월에 어머니를 잃었다. 당시 21세 청년이었던 김육은 평구(현재 남양주 삼패동)에 부친과 모친의 묘를 합장하였는데, 인부를 부를 돈이 없어 본인이 직접 흙과 잔디를 날라 묘역을 만들었다고 한다. 부모를 모두 잃은 뒤에는 서울에 사는 고모댁에 얹혀 살았는데, 삼년상 동안 새벽마다 묘소까지 걸어가서 곡을 하고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