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혈 재상, 김육 5편
■ 열혈 재상, 김육 5편
1649년(효종 1년) 효종이 즉위하자, 그는 전후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지적하고, 전후 복구와 민심 수습, 대동법 시행을 적극 건의하였다. 그해 5월 효종 즉위 초에 특별히 발탁되어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동년 9월 특진하여 의정부 우의정이 되었다. 그는 나이가 많은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재차 사임을 요청하면서 또 다시 대동법(大同法:조선시대에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제도) 확대 실시를 간하였다.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대하여 줄기차게 주장을 거듭한 열혈재상이었다. 결국 우의정에 제수된 김육은 간곡한 상소를 올렸다.
『신으로 하여금 나와서 회의하게 하더라도 말할 바는 이에(대동법 시행) 불과하니, 혹 쓰이게 되면 백성들의 다행이요, 만일 채택된 것이 없다면 다만 한 노망한 사람이 일을 잘못 헤아린 것이니, 그런 재상을 어디다 쓰겠습니까?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였으니, 신이 믿는 바는 오직 전하뿐입니다." 《효종실록》
이 말은 대동법을 실시하려면 자신을 쓰고 그렇지 않으면 ‘노망한 재상’으로 치부해 쓰지 말라는 말이었다. 효종이 대동법의 시행을 약속함에 따라 우의정에 취임하였으나, 조정 일각에서는 왕을 압박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김육의 반대 세력들은 이 글의 형식과 내용이 방자하다며 공격의 재료로 삼았지만 그 속마음은 대동법을 반대하는 데 있었다. 김육은 효종에게 대동법의 내용을 설명하고 이 법의 시행 여부는 오직 왕의 결단에 달려 있으니 만일 시행하지 못하겠으면 자신을 벌해달라는 강경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한편 그가 명리(名利)를 취하는 사람으로 일부 대동미 업자들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등의 각종 유언비어들이 돌면서 그를 괴롭혔다. 소문이 계속되자 효종은 한때 그를 의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육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위해 옳다고 생각한 바를 끝까지 관철시키려 했을 뿐이다. 만약, 그가 현실을 무시한 탁상 행정을 밀어붙였다면 그의 강한 추진력은 그냥 옹고집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의 강한 추진력은 많은 실무 경험이 뒷받침되었기에 그 빛을 발할 수 있었다.
김육은 조정에 나섰을 때부터 주요 실무직, 특히 호패와 재정, 외교 분야와 관련된 관직을 두루 섭렵했고, 이 덕에 현장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김육은 실현 가능성이 높은 정책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하여 추진할 수 있었다. 물론 실무에 있어서는 김육도 인정하는 전문 관료들이 많이 있었고, 김육의 역할은 직접 실무를 담당하기보다는 구체적 실천에 있어서 이들과 의논하고 이들에게 맡기면서 정치적 보호를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동법의 성공 원인이 오로지 김육의 일관된 고집만이 아니라 뛰어난 능력을 갖춘 전문 관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