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희와 한명회의 비교
■ 황희와 한명회의 비교
파주에서 서쪽으로 시오리 임진강가에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는데, 세종대의 명상이며 청백리의 귀감인 방촌 황희(尨村 黃喜) 정승의 정자이다. 18년간의 영의정 직을 사임하고, 90세의 천수를 다할 때까지 이름 그대로 갈매기를 벗하며 노년을 보낸 곳이다.
"서울 강남에는 압구정이라는 곳이 있다. 압구정은 세조의 모신(謀臣)이던 한명회(韓明澮)가 그의 호를 따서 지은 정자인 압구정이 있던 곳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반구정의 반(伴)과 압구정의 압(狎)은 글자는 다르지만 둘 다 벗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두 정자는 다 같이 노재상이 은퇴하여 한가로이 갈매기를 벗하며 여생을 보내던 정자인데, 남아있는 지금의 모습은 아주 다르다. 반구정은 지금도 갈매기를 벗하며 철새들을 맞이하고 있음에 비하여, 압구정은 이미 그 자취마저 없어지고, 아파트 옆 작은 표석(標石)으로 그 터임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각 정자의 주인인 황희 정승과 한명회의 일생만큼이나 대조를 보이고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던 재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은 언제나 명상(名相)·현상(賢相)으로 칭송되는가 하면, 또 한 사람은 권신(權臣)·모신(謀臣)으로 역사에 오명(汚名)을 남기고 있다.
세종의 위대한 업적 뒤에는 언제나 황희정승의 보필이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눈에 뜨이지 않는 자리에 있었고, 심지어 물러나 임진강가에서 어부들과 어울릴 때에는 그가 당대의 재상이었음을 아무도 몰랐을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한명회는 그의 두 딸을 왕비로 들이고 네 차례나 1등공신이 되었으며, 그의 뒤에는 언제나 쿠데타와 모살(謀殺)과 옥사(獄事)가 함께 하고 있었다. 한명회는 뒤에 신원(伸冤)되기는 하였지만, 부관참시(剖棺斬屍:죽은 뒤 큰 죄가 드러난 사람에게 내리는 극형)의 화를 입은 권력자였고, 스스로 실력자 곁에서 앞질러 헤아리고 일을 도모한 모신(謀臣)이었다. 황희정승은 두문동에 은거하기도 하고 유배되기도 하지만, 언제나 자신의 원칙에 따라 진퇴(進退)를 결정했다.
황희의 성품을 잘 나타내는 많은 일화들이 남아있다. 황희정승의 집안 노비 두 사람이 서로 다투다가 그를 찾아와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일러바치자, 사내종에게도 ‘네 말이 옳다’ 계집종에게도 ‘네 말이 옳다’ 하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를 지켜보던 부인이 그의 무정견(無定見)을 나무라자 ‘부인 말도 옳다’고 했다는 일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이면서, 황희의 성품을 잘 나타내주는 일화이다. 황희 정승이 겸허하고 관대한 일화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것에 비하여 한명회는 그와 정반대인 모사꾼과 간신배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