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은 ‘노예전쟁’
■ 임진왜란은 ‘노예전쟁’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에게 큰 상처를 남긴 처참하기 짝이 없는 전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침략 야욕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어느 의미에선 가장 전투력이 왕성한 국가와 가장 준비되지 않은 국가 사이의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은 150여년에 이르는 전국시대를 거치며 어떤 군대보다 전투력이 높은 상태였다. 특히 1543년 ‘조총’이라 불리는 장총을 서양으로부터 전래 받은 이후, 대대적으로 생산하고 실전에 배치한 상태였다.
이런 무력을 갖춘 군대 15만8천명이 1592년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당시 부산성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의 병력은 600명이었다. 7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에서 일본군은 조선인 18만5738명, 명나라인 2만9014명 등 모두 21만4752명의 수급(首級:적군의 머리)을 베었다고 집계된다. 일본은 이런 잔인한 만행을 저지르는 한편, 5만~10만명에 이르는 조선인을 무더기로 끌고 갔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을 ‘노예전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당시 도공들이 얼마나 많이 잡혀갔는지 조선에선 거의 30여 년 동안 찻잔도 제대로 생산하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에 끌려간 도공들은 큐슈의 사쓰마 등지에서 세계적인 도자기를 생산해 유럽에 대거 수출하는 등 일본 도자기 산업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래서 ‘도자기전쟁’ ‘문화전쟁’이라고도 한다. 일본에 끌려간 사람 가운데 일부는 노예로 또 다시 포르투갈 등 유럽으로 팔려가기도 했다.
전쟁 뒤 조선은 일본군의 살육과 전염병, 질병 등으로 인구가 격감해 경지 면적이 170만결에서 54만결로 크게 축소됐다. 3분의 1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의 존립마저 불투명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한양의 경우 임진왜란 170년 전인 1428년(세종 10년) 11만명에 이르던 인구가 전쟁 뒤 3만8천명으로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