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양과 바람이 공짜라는 그 유혹의 이면에는....
◇ 태양과 바람이 공짜라는 그 유혹의 이면에는....
사람들은 ‘착한 에너지’가 왜 우리 숲과 들판을 집어삼키고 있는지 궁금하다.
기후위기와 탄소의 셈법에서 우리는 중요한 진실 하나를 빼놓았다. 전기와 토지의 관계다. 화석연료를 재생에너지로 대체하려면 광대한 토지가 필요하다.
10년 전 사하라사막에 태양광발전 시설을 설치해서 유럽에 전기를 공급하려 했던 ‘데저텍(desertec) 프로젝트’처럼 그동안 대규모의 태양광 에너지 공급계획은 항상 사막이나 황무지를 대상으로 구상되었다. 문제는 그 토지가 누군가의 소중한 삶의 터전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다.
얼마 전 제주에선 해상풍력발전단지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시위가 있었다. 해녀들의 손팻말에는 “아름다운 제주 바당 풍력발전 설러불라(집어치워라)”라고 쓰여 있었다. 그 바다는 물질로 자식 키우고 살아낸 해녀들의 텃밭이고, 돌고래의 집이며, 어선의 항로이고, 새들의 고향이었다.
하지만 탄소 발생을 줄이려면, 결국 재생에너지와 전기자동차로의 전환은 필수적이지 않은가? 이런 생각은 오늘날 유일한 정답처럼 되어 있다. 다른 답은 없을까? 농촌의 노인들은 지구온난화를 ‘물이 줄어 땅이 뜨거워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강물이 마른 것, 논이 줄어든 것, 샘과 우물이 없어진 것, 수로를 사용하지 않아 공동의 수로관리가 없어진 것, 그런 것이 모두 땅을 마르게 하고 공기를 뜨겁게 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직관적이고 상식적인 혜안은 과학적 분석보다 훨씬 더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답은 불을 줄이고 물을 늘리는 것. 자동차는 줄이고 논과 숲은 늘려야 한다. 에너지의 종류가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제러미 리프킨류의 시장주의적 그린뉴딜은 ‘태양과 바람은 공짜’라며 우리를 유혹한다. 저 말은 땅은 얼마든지 있다고 환호하던 신대륙의 침략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태양도 바람도 공짜는 없다. 전기는 누군가의 땅과 몫을 빼앗고 우리에게 온다. 중동의 석유 전쟁은 배터리 원료인 리튬 전쟁으로 옮겨갔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소농들은 대규모 바이오연료 생산지에 땅을 빼앗기고 있다.
현재와 같은 문명적 삶을 유지하면서 그 동력을 모두 친환경에너지로 바꾼들, 그것이 다른 지역의 생태계와 삶터를 파괴하고, 값싼 노동과 희귀자원을 착취해서 이뤄지는 것이라면, 과연 ‘정의로운 전환’인가? 이제 그걸 물어봐야 한다.
-경향신문 채효정(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