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6일 화요일

함흥차사咸興差使

■ 함흥차사咸興差使

■ 함흥차사(咸興差使)

우리가 쓰는 말 중 ‘함흥차사’ 는 ‘가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비유할 때 사용한다.

함흥으로 떠나버린 태조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태종이 사신(차사)을 보낼 때마다 태조가 이를 죽여 돌아오지 못했다는 일화에서 생긴 말이다.

태조가 함흥으로 떠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태조 7년 1398년. ‘1차 왕자의 난’ 으로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세자 방석과 방번이 이방원(태종)에 의해 죽임을 당한 데 분개한 테조 이성계는 왕위를 둘째 아들(정종)에게 내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났다. 태조는 48세 늦은 나이에 강씨에게서 얻은 막내 방석(세자)을 무척 사랑했는데, 그가 이복형인 이방원에 의해 비참하게 죽자 충격을 받은 것이다.

2년 뒤, ‘2차 왕자의 난’ 이 다시 일어나 방원과 친형인 방간 사이에 살육전이 벌어지고, 방간은 방원에 의해 유배를 가게 되자, 방원을 미워하던 태조의 증오는 더욱 심해졌다. 뒤이어 형인 정종을 내몰고 방원(태종)이 임금으로 즉위하자, 태상왕(太上王)이 된 이성계는 개경을 떠나 고향인 함흥으로 가버렸다. 이는 태조가 이방원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방원에게는 커다란 손실이었다. 태종은 태조를 설득해 서울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인물들을 물색해 함흥으로 보냈는데 이들이 바로 함흥차사이다.

이성계는 정말 이들을 모두 죽였을까?

태조의 옛 친구인 성석린이 함흥차사를 자청하고 나서서 두 번이나 함흥에 갔으나 결국 빈손으로 돌아와 태종에게 “태상왕(太上王)께서 빨리 돌아오실지 늦게 돌아오실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라고 보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성계는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이다.

야사(野史)에는 이성계가 태종이 보낸 차사들을 셀 수 없이 죽였다고 전하지만, 실제 죽은 것으로 전해지는 유일한 인물인 박순도 이성계가 아니라 사실은 반란군인 조사의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 실록에 의하면 태조에게 보낸 많은 인물들의 이름을 전하는데 그 중 태조에게 죽은 인물은 없다. 더구나 이성계는 함흥에서 돌아와 평양에 머무를 때, “내가 동북면에 있을 때 국왕(태종)이 사람을 보내지 않았고, 맹주에 있을 때도 사람을 보내지 않았으니 감정이 없지 않다.” 고 한 것으로 보아 차사를 보내지 않아 오히려 섭섭해 한 것 같다.

이런 기록으로 보면 ‘함흥차사’는 후세에 지어진 이야기가 아닐까?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