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3일 토요일

서희가 살아있다면 외교부장관 감

■ 서희가 살아있다면 외교부장관 감

■ 서희가 살아있다면 외교부장관 감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이른바 ‘벼슬도’ 라는 것을 그려놓고, 생존여부에 관계없이 어느 벼슬에 누가 적격인가 이름을 써넣는 놀이를 즐겨했다고 한다. 이때 오늘날 외교부장관에 해당하는 예조판서로 가장 빈번히 이름이 오르는 사람이 서희(徐熙)이다. 거란(요)이 쳐들어왔을 때 적장 소손녕과 외교담판을 통해 전쟁 없이 강동육주(江東六州)를 획득한 사람이다.

과연 말로 영토를 획득하는 것이 가능할까?

거란족은 중국 당 말기의 혼란을 틈타 10세기 초 여러 부족을 통일하면서 거란을 수립하였다. 중국 본토를 넘보는 거란이 먼저 처리해야 할 현안은 후방에 있는 한반도(고려)와 만주(발해)였다. 먼저 발해를 멸망시키고 점차 영토를 확대시켜 드디어 947년에는 나라 이름을 요(遼)로 바꾸고 중국을 포함하는 대제국을 수립하겠다고 선포했다.

요는 중원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고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든지, 속국으로 만들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했다. 요는 고려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사신과 낙타 50마리를 보냈다. 하지만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것에 분개해 있던 태조 왕건은, 사신은 섬으로 유배 보내고 낙타는 개성의 만부교 아래 매달아 굶겨 죽였다. 이에 고려와 거란은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고, 고려 성종 12년에 장수 소손녕을 보내 고려를 공격하게 되었다.

고려는 이에 패배하고 봉산군(현재 청천강 이북 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할 수 없이 고려 성종은 화해를 표명했으나, 소손녕은 거듭 항복만을 요구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항복하자’는 주장과 ‘서경(평양) 이북의 땅을 떼 주자’는 주장이 팽배하고 성종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를 전면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 중군사(中軍使) 서희였다.

그는 요의 침입목적이 고려정복이 아니라 중국(송)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화의를 맺는 것에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외교담판을 벌이기 위해 성종의 국서(國書)를 들고 소손녕을 찾아갔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후예로 옛 고구려의 땅은 우리 것이므로 너희가 우리 땅에 들어와 나라를 세운 것이다. 지금 너희 나라와 국교를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족이 중간에 있음이므로, 여진족을 내쫓고 우리 옛 땅을 회복하여 길을 통하게 한다면 어찌 국교가 통하지 않겠는가”

서희의 주장을 요나라 성종에게 보고하니 고려가 이미 화의를 요청했으니 철수하라고 회답했고, 나아가 고려가 압록강 유역의 영토를 개척하는 데에도 동의한다는 글을 보내왔다.

다음해 고려 성종 13년 서희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몰아내 강동육주(江東六州)에 성을 쌓아 고려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대동강 이남으로 축소된 고려 영토를 압록강 유역까지 넓힌 것이다. 요의 침입은 고려에게 분명 위기였으나 서희는 냉철한 판단력과 담력으로 이 위기를 영토 확장이라는 기회로 전환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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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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