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궁인宮人 무비無比
■ 궁인(宮人) 무비(無比)
천인 출신의 후궁 무비(無比:생몰년 미상)는 고려 의종의 후궁이다. 원래는 남경(현재 서울)의 관비(官婢)였는데, 의종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고 후궁이 되었다. 비교(比較) 대상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여 이름도 ‘무비(無比)’라고 하니 아마도 뛰어난 미색(美色)으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의종에게는 이미 장경왕후와 장선왕후가 있었다. 장경왕후는 1남 4녀를 낳았고, 장선왕후는 자식이 없었는데, 무비는 무려 3남 9녀를 낳았다. 두 왕후가 언제 죽었는지, 혹은 의종이 폐위될 때까지 살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무비는 의종의 총애를 받으며 왕후 못지않은 조정 내 세력을 가지고 의종이 폐위될 때까지 그 곁을 지키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궁내(宮內)에서 무비와 가장 가까운 인물은 환관 백선연이었다. 남경의 관노(官奴) 출신으로 의종이 남경에 갔을 때 인물됨을 보고 데려와 ‘양자(養子)’라 부르며 총애했다. 무비와 같은 남경 출신에 신분도 같았으니 드넓은 궁에서 둘 사이의 연대감은 아마도 남달랐을 것이다. 이 때문에 둘이 간통을 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관리들은 이들이 추잡한 행동을 하고 미신으로 왕을 유혹해 재물을 낭비한다며 백선연과 무비를 죽이라고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시 환관에 대한 왕의 총애가 매우 컸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다 부러워하였고, 스스로 거세하는 자가 생겨나기도 했다.
의종실록을 보면, ‘의종 때 무신의 난이 일어난 원인은 불교와 귀신 숭배, 아첨하는 신하와 간사한 환관 및 술사, 그리고 무비이다.’ 라고 적고 있다. 즉 무비가 안에서 정사에 개입하고 감언이설로 왕의 비위를 맞추며 눈과 귀를 막아 충직한 말을 들을 수 없어서 결국 변란이 일어났다고 쓰고 있다. 쫓겨난 왕에 대해 호의적인 기록일 수는 없지만, 그 당시 무비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12명의 왕자와 왕녀를 낳은 무비도 신분적인 한계는 뛰어넘을 수 없었다. 무비의 사위가 분에 넘치는 관직에 임명되자, 사대부들이 모두 분개하고 해당 관리들은 임명장의 서명을 거부하였다. 이렇게 반발이 거셌던 것은 고려가 신분제 사회였고, 아무리 왕의 딸이라 해도 어미가 천하니 딸도 천하고, 그 남편 역시 관직에 제한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무비의 아들들도 왕자로 대우받지 못했다. 그들은 ‘소군(小君)’이라 하여 강제로 중이 되어야 했다. 무비 역시 ‘궁주(宮主)’나 ‘원주(院主)’, ‘비(妃)’ 등 다른 후궁들이 갖는 내명부 관직을 받지 못했다. 고려시대 천인 출신 후궁의 위상과 특징을 잘 보여주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무신의 난’이 일어나자 무비는 개경 근처에 있는 청교역(靑郊驛)으로 도망가서 숨었다. 이를 정중부가 잡아서 죽이려 했는데, 공예태후(의종의 母)가 간청해 죽음을 면하고 왕을 따라 거제도로 갔다. 이후 3년 뒤 의종은 시해되었고, 무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도 없어 알 수가 없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