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벽상관作壁上觀 - 성벽에서 싸우지 않고 구경만 하다, 승패만 보고 도와주지 않다.
작벽상관(作壁上觀) - 성벽에서 싸우지 않고 구경만 하다, 승패만 보고 도와주지 않다.
지을 작(亻/5) 벽 벽(土/13) 윗 상(一/2)
힘이라 하면 項羽(항우)가 대명사다. 그리스의 헤라클레스(Heracles)는 신화 속 인물이라 겨룰 수도 없고, 산을 뽑을 만한 힘에 기개는 세상을 덮는다는力拔山氣蓋世/ 역발산기개세 항우의 힘을 당할 사람은 없겠다. 중국을 처음 통일한 秦始皇(진시황)이 죽고 각지서 군사들이 일어났을 때 楚(초)의 명문가 출신 항우는 스물네 살의 나이에 숙부 項梁(항량)과 함께 병을 일으켜 싸움터마다 연전연승했다. 그러다 漢(한)의 劉邦(유방)의 지모에 밀려 황제 자리를 뺏기고 31세의 나이에 자결하는 파란만장한 삶은 楚漢(초한)전쟁을 다룬 책마다 흥미 있게 펼쳐진다.
벽을 만들고(作壁) 위에서 바라보기만 한다(上觀)는 말은 초나라 항우군이 대승을 거둔 鉅鹿(거록) 전투에서 나왔다. 싸움을 도와주러 온 제후군이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고 구경만 하니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袖手傍觀(수수방관)이나 坐觀成敗(좌관성패)와 다를 바 없다.
趙(조)나라의 거록성에 秦(진)의 주력군이 공격하자 항우와 제후군이 연합하여 방어했다. 항우군의 대장 宋義(송의)가 강을 사이에 두고 40여일 질질 끌자 속이 탄 항우가 그의 머리를 베고 군권을 잡았다. 강을 건넌 뒤 배를 가라앉히고 솥을 깨뜨리는 破釜沈舟(파부침주)의 기세로 거록성에 육박하여 일당백의 활약을 펼친 항우는 대승을 거두었다.
司馬遷(사마천)의 ‘史記(사기)’에는 이 부분을 이렇게 묘사한다. 거록을 구하러 온 제후군이 10여 진영이 넘었으나 감히 군대를 내보내지 못했다. ‘초나라가 진의 군대를 공격할 때 제후군의 장수들은 모두 성벽의 보루에서 관전만 하고 있었다(及楚擊秦 諸將皆從壁上觀/ 급초격진 제장개종벽상관).’ 용맹스러운 초군의 함성이 하늘을 진동시켜 모두 두려워했고 이 전투 이후 항우는 제후들의 상장군이 되었다.
실제 왕이 되지도 못했고 楚覇王(초패왕)으로 자칭했을 뿐인 항우를 사마천은 제왕들의 전기인 本紀(본기)에 올려 대우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항우가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한 사실을 인정했다. ‘항우 장사’라는 말이 고집의 대명사도 된다. 뭇 제후를 밑에 두게 된 항우는 주위의 의견도 듣지 않고 기고만장 날뛰다 민심을 잃고 四面楚歌(사면초가)로 쫓기면서 약체였던 유방에 밀렸다. 천하의 장사이고 전투에 능한 명장이라도 제멋대로이면 따돌림을 당한다.
10여 제후국을 거느리고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몰락한 것은 자초한 일이다. 지도자가 건설적인 의견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기 갈 길만 간다면 아래 조직원들은 입을 닫게 되고 그 단체는 빤한 결말이 기다린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