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 금요일

홍로점설紅爐點雪 - 벌겋게 단 화로 위의 한 송이 눈, 의혹이 일시에 사라짐

홍로점설紅爐點雪 - 벌겋게 단 화로 위의 한 송이 눈, 의혹이 일시에 사라짐

홍로점설(紅爐點雪) - 벌겋게 단 화로 위의 한 송이 눈, 의혹이 일시에 사라짐

붉을 홍(糸/3) 화로 로(火/16) 점 점(黑/5) 눈 설(雨/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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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포근하다. 번잡하고 사악한 세상을 포근히 감싼다. 황막한 벌판을 하얗게 덮도록, 앙상한 앞산을 고이 덮어주기를 시인은 원한다. 모두에게 그렇지는 않다. 연일 눈이 날리고 쌓여 사방이 막히면 除雪(제설)하는 사람은 죽어난다. 그 위에 서리까지 치면 雪上加霜(설상가상)이다. 그래도 눈은 약하다. 북풍한설도 봄이 되면 눈 녹듯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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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 벌겋게 달아오른 화로(紅爐)에 한 송이의 눈(點雪)을 얹으면 순식간에 녹는다. 시의 한 구절같이 멋진 비유인 만큼 나타내는 뜻도 다양하다. 사욕이나 의혹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을 말하거나 도를 깨달아 미몽에서 깨어나는 것에서 큰 힘 앞에 맥을 못 추는 사소한 일을 가리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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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의미인 만큼 가장 먼저 사용된 곳이 명확하지 않은 채 여러 곳에서 인용됐다. 먼저 1125년 완성된 禪宗(선종)의 불서 ‘碧岩錄(벽암록)’에서는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는 자유자재의 경지를 나타냈다. ‘망념 망상의 가시 숲을 헤치고 나온 선승은 무슨 짓을 하건 자취를 남기지 않고 움직인다(透荊棘林 衲僧家 如紅爐上一點雪/ 투형극림 납승가 여홍로상일점설).’ 69칙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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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주자)와 문인 사이에 행해진 문답의 기록 ‘朱子語類(주자어류)’엔 顔子(안자)의 사욕을 멀리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안자의 극기는 마치 붉은 화로 위에 한 점 눈이 떨어진 것과 같다(顔子克己 如紅爐上一點雪/ 안자극기 여홍로상일점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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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딱딱한 출처 말고 멋진 용례로 우리의 고전에도 자주 나타난다. 西山大師(서산대사)가 승병장을 마치고 70명의 제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입적하면서 臨終偈(임종게)를 남겼다. 죽음은 뜬 구름이 사라지는 것(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이라고 말한 대사인 만큼 의미심장하다. 전문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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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가지 계획과 만 가지 생각이, 불타는 화로 속 한 점 눈일 뿐(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천계만사량 홍로일점설), 진흙 소가 물 위를 걸어가니, 대지와 허공이 함께 무너지네(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니우수상행 대지허공렬).’ 진흙으로 빚은 소가 泥牛(니우)인데 泥牛入海(니우입해)라 하면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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紅爐一點雪(홍로일점설)이라 해도 같은 뜻의 이 성어는 도를 깨달아 앞이 훤히 틔는 상태를 말하는 큰 뜻 외에 거센 불길 앞에서는 한 송이 눈이 미약하여 속수무책인 양면성이 있다. 雪泥鴻爪(설니홍조)라고 같은 눈이 나오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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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나 진흙 위에 난 기러기의 발자국이란 의미인데 이것은 녹으면 곧 사라지는 인생의 무상이다. 모든 의혹을 밝혀 앞날이 창창한 대로만 남았어도 그 또한 변하면 어찌될지 모르는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다. 오늘의 힘이 언제까지나 지속되지 않는 것 또한 당연하니 말이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