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6일 화요일

정도전 개혁의 한계

■ 정도전 개혁의 한계

■ 정도전 개혁의 한계

정도전은 개국의 중요한 일 중 하나로, 도읍을 새로 정하려 물색하다가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했다(1394). 풍수지리에도 능했던 정도전은 한양을 둘러보고 단숨에 간파했다. 당시 한양은 한반도의 한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거대한 한강을 끼고 있어 교통도 편리했고, 산으로 둘러싸여 방어에도 유리하였다.

정도전이 아닌 무학대사가 한양을 도읍지로 정했다는 설도 있으나, 무학대사는 지금의 계룡산 부근을 더 선호했다는 말도 전해져 내려온다. 어쨌든 당시 상황으로서는 정도전의 동의가 없었다면 한양이 도읍지로 결정되지 못했을 것이다. 정도전은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하고 도성을 지으면서 4대문(大門)을 세웠는데, 인의예지(仁義禮智)라는 유교적 덕목을 반영하여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경복궁, 근정전등 궁궐의 이름도 정도전이 손수 지었다. 한양은 이듬해 한성부로 이름이 바뀐다.

정도전의 개혁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큰 개혁이었다. 그러나 당시도 기득권 세력은 강했다. 나라가 바뀌어 중앙 지배층 내에서는 큰 변화가 있었지만, 전체 지배층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정도전의 개혁 또한 실제로 제도를 운영하는 방안을 보면 소수 공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처음의 개혁의도와는 달리 조금 시간이 지나자 개혁 층 속에서도 부패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정도전이 개혁을 단행하려 했던 시기도 너무 짧았다. 조선을 건국하고 개혁을 시작한 지 7년 만에 정도전이 이방원에 의해 살해당함에 따라 정도전의 개혁도 끝이 나고 말았다.

우리 역사 발전으로 봤을 때도 안타까운 일이다. 정도전이 죽지 않고 그 개혁이 성공하여 유교민본주의 이념 아래 재상중심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물론 정도전이 죽은 뒤에 신흥사대부 개혁세력이었던 조준과 손을 잡은 태종 이방원에 의한 개혁도 외형상으로는 정도전 개혁과 비슷했지만 겉모습만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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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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