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행을 턴 독립군들
■ 은행을 턴 독립군들
1920년 1월 4일 저녁, 한인 무장단체인 ‘철혈광복단’ 단원 6명이 간도 룽징(龍井)에서 일제 조선은행의 무장 호송대를 습격해 일본인 경관 등 2명을 죽이고 돈 궤짝을 빼앗아 달아났다. 만주 일대가 발칵 뒤집어졌다. 돈 궤짝 안에는 5원과 10원짜리 지폐 다발로 15만 원이 들어 있었다.
지금 가치로는 100억 원이 넘는 엄청난 액수였다. 이 돈은 중국 옌지(延吉)와 함경도 회령을 잇는 길회선 철도 부설 자금이었다. 헌병대 추격을 따돌린 단원들은 나흘 밤낮을 달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이 정도 돈이면 독립군 5000명을 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시킬 수 있는 규모였다. 하지만 체코군이 매물로 내놓은 무기 3만여 정을 사려던 이들은 밀정(密偵)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탈취한 돈도 대부분 회수되었다. 단원 중 최봉설(1897~1973)은 가까스로 도망쳤지만, 3명은 서대문형무소의 사형대에 오르게 되었다. 이 사건은 3·1운동으로 대표되는 비폭력 독립운동이 1920년 6월 봉오동전투, 10월 청산리전투 등 무장 독립투쟁으로 전환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한일병탄 후 만주 독립단체들이 군자금을 모으는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였다. 현지 동포들에게 기금(基金)을 걷거나 국내에 잠입해 친일 부호의 돈을 뜯어내는 방법이었다. 기록을 보면 군자금 임무를 맡은 대원들은 “영수증 발급을 의무화”하며, 모금에 따른 거부감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동포 대부분은 소작농이나 영세 상인이었고, 식민통치에 협력하는 자들은 가진 돈을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었다. 이렇다 보니 액수 면에서 개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은행이나 현금 차량을 노리는 대담한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
국내에서도 ‘대한광복회’가 경북 경주에서 우편마차를 습격한 일이 있었다. 1912년 12월 24일 새벽 광복회의 두 사람이 직접 행동에 나서 일제가 거둔 세금 8700원을 가로챘다. 권영만(1878~1964)은 환자(患者)로 가장해 일본인인 우편마차 주인집에서 숙박한 뒤 병원 치료를 핑계로 마차에 올라탔다. 또 우재룡(1884~1955)은 마차가 지나갈 다리를 부수고 기다렸다가 마차가 잠시 멈춘 사이 돈을 챙겨 달아났다. 이 사건은 일제 강점기 내내 미해결 사건으로 분류된 ‘완전범죄’였다. 대략 4억 정도로 추산되는 이 돈은 만주 독립군의 활동자금으로 쓰였다.
이런 명분있는 ‘모방범죄’들이 계속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920년 11월 국내 한일은행 습격을 모의한 서간도의 ‘보합단’ 단원들이 처형되는 일도 벌어졌다. 또 1929년 4월에는 최양옥(1893~1983)등 ‘대한독립공명단’ 단원들이 경성에 잠입해 일제의 우편물 차량을 공격하기도 했다.
추격전 끝에 결국 붙잡히긴 했지만 ‘대낮 3인조 강도단’ 사건은 호외가 뿌려질 정도로 전국을 들썩이게 했고, 아울러 독립을 향한 우리의 무장 항쟁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잘 정비된 군사 조직도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오직 애국심 하나로 뭉친 독립군들의 목숨을 건 눈물겨운 항쟁이었다. 이런 많은 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우리는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