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0일 토요일

일수사견一水四見 - 한 가지 물을 네 가지로 보다, 사물을 모두 똑 같이 인식할 수 없다.

일수사견一水四見 - 한 가지 물을 네 가지로 보다, 사물을 모두 똑 같이 인식할 수 없다.

일수사견(一水四見) - 한 가지 물을 네 가지로 보다, 사물을 모두 똑 같이 인식할 수 없다.

한 일(一/0) 물 수(水/0) 넉 사(口/2) 볼 견(見/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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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사안을 두고 생각하는 것이 천차만별인 것처럼 구체적인 물건을 보고도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경우가 많다. 아는 만큼 보이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여긴다는 좋은 비유에 群盲撫象(군맹무상)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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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코끼리를 두고 앞이 보이지 않는 장애인들마다 뱀으로, 무로, 평상 등으로 자기가 만진 것을 진짜로 여긴다. 잘 보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주관이나 선입견에 얽매여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한다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불교에 같은 사물을 보는 주체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좋은 가르침이 있다. 한 가지의 물(一水)을 가지고 네 가지로 본다(四見)는 성어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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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물인데 그 물이 환경에 따라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니 한 가지만 절대적으로 옳다고 고집하면 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一境四見(일경사견), 一境四面(일경사면), 一境四心(일경사심) 등도 비슷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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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唐(당)나라의 고승으로 大唐西域記(대당서역기)를 남겨 잘 알려진 玄奘(현장)법사는 法相宗(법상종)의 주요 성전 ‘唯識學(유식학)’도 번역했는데 성어는 여기에 나온다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더라도 받아들이는 사람 각자의 능력인 根機(근기)에 따라 진리를 얻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고 해도 같은 물을 보는 주체에 따라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내용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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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사람이 보면 보배로운 못으로 보이고(天見是寶嚴池/ 천견시보엄지), 인간이 보면 마시는 물로 보이나(人見是水/ 인견시수), 물고기가 보면 사는 집으로 보이고(魚見是住處/ 어견시주처), 아귀가 보면 피고름으로 보인다(餓鬼見是膿血/ 아귀견시농혈)’고 한 것이다. 이처럼 각기 달리 보이니 인용한 경전에 따라 조금씩 차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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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볼 때 琉璃(유리), 귀신이 볼 때는 불을 생각한다(鬼見水思火/ 귀견수사화)는 것 등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한 가지 물도 네 가지로 보인다는 것은 한 가지로 분명히 할 수 있는 경지는 있지 않다(一水四見 明境非有/ 일수사견 명경비유)’는 것으로 보기도 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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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의 모든 것은 각자가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라는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를 연상하게도 한다. 모든 사물을 모두에게 똑 같이 생각하고 느끼도록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재미있는 말이 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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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眼豚目(불안돈목)은 부처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자애롭고,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추하다는 뜻이다. 자기 위주로 색안경을 끼고 본다면 나 아닌 전부가 잘못이고 불만이다. 모여 살아가는 사회에서 시각에 따라 평가가 다르니 최대한 공통되는 생각을 도출하고 결과를 인정해야 발전한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