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6일 화요일

불교에 호의적이었던 조선 왕

■ 불교에 호의적이었던 조선 왕

■ 불교에 호의적이었던 조선 왕

조선은 사대부가 세운 나라로 유교가 기본이념인 국가이다.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을 기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불교는 내내 억눌려 있었지만, 왕의 성향이나 사정에 따라 기복(起伏)이 있었다. 테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불교에 어느 정도 관대했지만, 태종이 즉위하면서 도첩제(度牒制:승려가 출가했을 때 국가가 허가증을 발급하여 신분을 공인해 주던 제도)를 엄하게 시행하여 많은 승려들을 환속시키고,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고, 왕사(王師)·국사(國師) 제도도 폐지했다. 왕릉 근처에 죽은 왕의 명복을 빌고 재(齎)를 올리는 원찰(願刹)을 짓는 것도 금지했다. 그러다가 세종 후기부터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

세종은 48세에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을 잃고, 이듬해에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마저 잃었다. 그 이듬해에는 금슬 좋던 소헌왕후와 사별하게 된 대다가 건강마저 악화되자,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불교에 마음을 기울이게 되었다. 경복궁 안에 내불당(內佛堂)을 두었더니 유생들의 반대가 빗발쳤다. 세종은 수랏상을 물리는 철선(撤膳)으로 단식투쟁을 하고 넷째 아들 임영대군 집으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하였지만 유생들의 반발이 수그러들지 않자, 결국 왕위를 내어놓겠다고 협박하여 반대를 무마할 수 있었다.

세조는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김종서, 황보인을 죽이고 노산군(魯山君:단종)을 죽이는 등 손에 많은 피를 묻혔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세조가 상왕(上王: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내고 난 다음 날 낮잠을 자는데, 형수이자 노산군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 귀신이 꿈에 나타나 “네가 내 아들을 죽이려고 하니 내가 네 아들부터 데려가야겠다.” 하면서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얼굴에 종기가 나기 시작했다. 화가 난 세조는 곧 현덕왕후를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능은 파헤쳐 관을 사흘 동안 버려두었다가 물가에다 다시 묻게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 현덕왕후의 저주가 왕세자에게 뻗쳤는지, 세자가 병을 앓게 되자 승려 20여명을 불러들여 경회루 아래에서 재를 올리게 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왕세자는 스무 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세조는 부스럼으로 죽을 때까지 고생을 겪게 되었다.

세조는 자신의 업보를 어떻게 해서든지 씻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원각사를 짓고 불경을 간행하게 하였으며, 자신은 오대산 상원사, 양양 낙산사, 금강산 건봉사 등을 전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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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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