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과 상평통보
■ 숙종과 상평통보
숙종은 성리학 이념 강화와 실천에도 주력했지만, 실물경제에도 깊은 감각을 지닌 왕이었다. 1678년(숙종 4년) 숙종은 대신과 비변사 여러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화폐 주조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허적, 권대운 등은 변화하는 사회상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으로 화폐 시행을 적극 건의했고, 숙종은 군신의 의견을 재차 구했다. 참석한 신하 대부분이 화폐 유통의 필요성에 공감하자, 숙종은 호조, 상평청, 훈련도감 등 각종 기관에 명해 상평통보(常平通寶)를 주조하게 했다.
돈 400문(文)을 은 한 냥의 값으로 정해 시중(市中)에 유통하게 했다. 따라서 400문이 은 한 냥의 가치를 갖게 했으니, 은 한 냥은 동전(상평통보) 4배의 가치를 갖게 되는 셈이었다. 조선시대 화폐 단위인 1문은 1푼이라고도 했으며, 10푼이 1전, 10전이 1냥이 됐다. 10냥은 1관으로 관이 최고(最高)의 화폐 단위였다.
오늘날에는 한국조폐공사에서만 화폐를 만들지만 조선 시대에는 여러 관청에서 화폐를 주조했다. 상평통보는 나무처럼 생긴 주전(鑄錢) 틀에 금속을 녹여 부어서 동전을 만들어 떼어내는 방식을 취했는데, 요즈음도 흔히 쓰이는 ‘엽전(葉錢)’이라는 용어 역시 동전이 주전 틀에 나뭇잎처럼 달려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상평통보가 주조됨으로써 조선사회는 본격적인 화폐 유통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
상평통보 도입 초기에 백성들은 조그만 동전으로 과연 쌀이나 옷을 살 수 있을 지를 두려워해 유통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동전을 가져오는 자에게 직접 명목가치에 해당하는 현물을 바꿔주는가 하면, 중앙 관리를 각 지방에 파견해 동전 사용을 독려했다. 또한 정부가 직영하는 시범 주점과 음식점을 설치해 화폐 유통의 편리함을 널리 홍보했으며, 세금을 화폐로 받기도 했다. 한성부, 의금부 등에서는 죄인의 보석금도 현물(現物) 대신에 동전으로 받으면서 화폐 유통을 촉진시켜 나갔다.
숙종 시대에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된 배경에는 국왕의 화폐 유통에 대한 의지와 함께 조선 후기 농업 사회가 서서히 상공업 사회로 전환하는 시대적 상황이 한몫을 했다. 세금과 소작료도 동전으로 대납(代納)할 수 있게 하는 조세 금납제(金納制)의 시행도 화폐 유통을 촉진시켰다. 국가 입장에서도 국가 재정을 위한 재원 확보 정책으로 상업과 수공업의 중요성이 대두됐고, 화폐 유통은 동전의 재료가 되는 광산 개발과 상업 발달을 촉진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