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적 안목을 가진 세종대왕
■ 국제적 안목을 가진 세종대왕
세종대왕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에 동부승지(지금의 비서실장) 정이한(鄭而漢)에게 남긴 유언이 세종실록에 남아있다. 뜻밖에도 가족이나 후손들에게 남기는 말씀이 아니었다. \xa0
『接待倭、野人, 所係匪輕, ?於平安, 歲久日深, 凡事恐或至於緩弛, 當謹愼常如一日, 毋或少弛。" 卽命禮兵曹, 當該官戒飭之。』 <세종 32년(1450년) 2월14일>
"왜인(倭人)과 야인(野人)을 대하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xa0오랫동안 평안(平安)에 빠져 있다가 혹 해이해지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는 바이다.\xa0언제나 하루와 같이 정신을 바짝 차려\xa0조금이라도 해이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곧 예조와 병조의 해당 관리들에게 이를 단단히 이르라고 명하였다.“
일본인과 북방인을 소홀히 여기고 태평세월의 안일에 젖어 방심한 채 지내다가는 큰일 날 수 있으니 그러지 않기를 신신당부하는 말씀이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 닥칠 불행한 미래를 예측이라도 한 듯한 당부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후손들은 세종이 남긴 유언을 명심하지 않았고, 세종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150여년 후 조선은 왜란(倭亂)과 호란(胡亂)으로 초토화되었고, 그 로부터 다시 300여 년 후에는 아예 나라를 일본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조선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을 기본 외교정책으로 삼고 있었다. 즉, 명과는 사대(事大)관계를, 일본을 비롯한 북방민족들과는 교린(交隣)정책을 펴면서 평화를 유지하고 실리를 취하려 하였다. 일본과 북방 야인들은 조선을 찾아와 조공을 바치기도 하고 물건을 교환하기도 했다.
세종대왕은 중국 뿐 아니라 멀리 이슬람문화까지도 편견 없이 수용했다. 또한 국가 경영은 유교가 중심이었지만 내면적인 신앙은 불교에 의지하고 있었다. 세종이 늘 학문적 스승으로 삼았던 측신 설순(시강관, 안동 현감, 집현전 부제학 등 역임)은 위구르족 출신이었다. 무엇보다도 세종대왕이 만 5세일 때(태종2년) 만들어진 아프리카와 유럽까지를 다 담고 있는 세계지도인 강리도(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보고 자랐고, 세계인으로서의 국제적 감각과 안목을 키우게 되었다.
세종대왕의 세계적 안목과 종교를 초월한 문화적 포용력이 한글 창제, 지리지 편찬, 과학기구 제작 등 폭넓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샤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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