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6일 토요일

◇ 중국 침투 경계, ‘한국판 해밀턴’ 나올 수 있나

◇ 중국 침투 경계, ‘한국판 해밀턴’ 나올 수 있나

◇ 중국 침투 경계, ‘한국판 해밀턴’ 나올 수 있나

올해 68세의 호주 학자 클라이브 해밀턴은 원래 중국 전문가는 아니다. 호주 찰스 스터트 대학의 공공윤리 교수로 오랜 세월 기후 변화와 경제 발전, 지속 가능한 성장 등의 문제를 연구했다. ‘한국의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아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그런 그가 중국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베이징올림픽이 열리던 해인 2008년이다. 당시 성화가 캔버라를 지날 때 티베트 독립을 외치는 시위대가 등장했다. 서방 국가에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한데 곧 충격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수만 명의 중국인 유학생들이 시위대를 폭행한 것이다. 어떻게 호주의 수도 한복판에서 호주 사람이 중국 학생에게 매를 맞을 수 있나.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2016년 호주의 한 유력 정치인이 중국 자금과 연루된 스캔들로 낙마했다. 해밀턴은 이런 일련의 사건을 호주 민주주의와 중국의 충돌이라는 시각에서 봤다. 그리고 이때부터 호주 사회 곳곳에 파고드는 중국의 영향력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나섰다. 그 결과물이 2018년 나온 『Silent Invasion』으로 국내엔 올해 『중국의 조용한 침공』으로 번역돼 출판됐다. 호주의 정계와 학계, 언론계, 재계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침투하는 중국의 파워를 실감 나게 적시했다. 중국의 거센 반발로 호주에서 책을 낼 출판사를 찾기조차 쉽지 않았다고 한다. 중국의 입김이 이미 호주 출판사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것이다.

중국에 대한 해밀턴의 시각을 100% 수용할 순 없겠지만, 그가 드는 호주의 여러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결코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게 호주 정가의 ‘중국 클럽’이 아닐까 싶다. 호주는 의도를 갖고 접근하는 중국에 대해 왜 과거 무방비로 당했나. 해밀턴은 두 사람의 전직 총리를 거론한다. 1983년부터 91년까지 총리를 역임한 밥 호크, 그리고 호크의 뒤를 이어 96년까지 총리 자리를 지킨 폴 키팅 두 사람이다. 호크와 키팅 시절 부상한 호주의 정치 조언자 그룹은 호주의 미래가 아시아에 달렸다고 주장했고, 2000년대 들어 이 논리는 “중국이 호주의 운명이다”라고 바뀌었다.

호크와 키팅은 중국의 의도는 늘 평화적이며 중국이 경제 대국이 되는 건 지난 2500년 동안 중국이 차지했던 자리에 복귀하는 것일 뿐이라며 호주를 안심시켰다. 이들은 특히 퇴임 후 중국의 ‘충직한 친구’가 됐는데 호크는 중국 기업의 계약 체결을 돕는 일에 집중해 10년간 5000만 달러의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반면 키팅은 중국 지도자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에 자신이 중국을 가장 잘 안다고 주장하며 영향력 확대에 주력했다. 중공 지도층이 외국인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고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는데 키팅이 그런 케이스란 이야기다. 호크와 키팅의 경우는 많은 한국 정치인이 낙선 등으로 한가해지면 중국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와 ‘중국의 친구’로 변신한 모습을 보여주는 걸 떠올리게 한다.

중국이 호주 학계를 길들이는 방법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해밀턴에 따르면 중국은 호주 학자들이 알아서 자기 검열을 하도록 했다.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다. 하나는 중국에 비우호적인 학자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리는 것이다. 블랙으로 분류된 학자에겐 중국 비자 발급이 불허된다. 수십 년을 투자해 중국 지식을 쌓은 전문가에게 중국방문 금지란 학자이기를 포기하라는 사망 선고에 다름 아니다. 다른 한 방법은 호주 대학과 각종 협력사업이나 재정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중국의 돈이 들어오는 걸 마다할 대학은 없다. 그 결과 호주 대학들이 “중국이나 중국 역사를 독립적으로 일관되게 분석하는 일을 포기했다”는 게 해밀턴의 주장이다.

호주가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어떤지가 궁금해지는데 그는 한국에 대한 쓴소리도 마다치 않는다. “이미 한국 재계엔 베이징의 만족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강력한 이익집단이 자리 잡고 있다. 베이징은 또 한국의 학계와 정계, 문화계, 언론계 지도층 전반에 베이징 옹호자를 확보했다. 중공의 목표는 한국 기관들의 독립성을 훼손함으로써 지역 패권을 노리는 베이징에 저항할 한국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의 정치 지도층은 지레 겁을 먹고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모호성’이란 나약한 태도를 유지한다” “한국 정부가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의 독립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위험한 도박을 하는 셈”이란 듣기 거북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호주가 과거 중국에 나약한 모습을 보이다 최근 강경한 자세로 바뀐 데는 그의 저서가 한몫했다고 한다. 그리고 해밀턴은 세계 언론과 싱크탱크가 중국에 관한 의견을 구할 때 가장 먼저 찾는 인사 중의 하나가 됐다. 그 많은 호주의 중국 전문가가 감히(?) 하지 못하던 일을 그가 해낸 셈이다. 중국 출입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학자의 용감함이 이뤄낸 결과인가. 자연히 그다음 관심은 우리 학계에 쏠린다. ‘한국판 해밀턴’이 나올 수 있나?

-중앙일보 중국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