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6일 화요일

태종과 영조의 세자교육법

■ 태종과 영조의 세자교육법

■ 태종과 영조의 세자교육법

두 임금은 장자(長子)를 세자로 삼았지만, 그 세자들이 문제가 많아 속을 엄청 썩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세자를 대하는 방법은 아주 달랐다. 둘 다 폐세자(廢世子)를 하기는 했지만, 폐세자 후 세자에 대한 대처방법도 달랐고 두 세자의 운명도 달랐다.

태종은 정실 소생으로서 어려서부터 무인기질이 있었고 항상 자신감에 넘쳐있었다. 언제든지 자신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자신만만한 스타일이었지만,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흠이 있었다.

이에 비해 영조는 천민 무수리 아들로서 출생에 치명적인 약점과 열등감이 있었고,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노론 덕택에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선왕이자 이복형이었던 경종 독살설의 주모자로 의심을 받았다. 그래서 즉위 초 영조는 소심했고 흠을 잡히지 않기 위해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면서 신하들의 눈치를 많이 봐야 할 상황이었다.

태종의 인생을 살펴보면 과감하고 냉정하며 그리고 철두철미했다. 그리고 왕권도 조선의 전(全) 시대를 통틀어 가장 강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는 조금 약했던 거 같다. 양녕대군이 그렇게 심하게 말썽을 피워도 크게 혼내지 않고 많이 참아주고 지켜 봐주는 편이었다. 태종보다는 유교 성리학에 빠진 신하들이 더 받아들이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폐세자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태종은 자기가 걸었던 골육상쟁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장자인 양녕대군을 끝까지 보호하고 지켜주고 싶어했다. 그러나 양녕대군 스스로가 왕위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어 스스로 세자 자리를 물러났다. 태종은 세자에서 물러나 지방으로 내려가는 양녕대군에게 충분한 노비를 주고 먹고 사는 데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조치를 취해주었다. 덕분에 양녕대군은 당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를 누리면서 천수를 다 채우고 죽었다.

영조는 원래부터 학문을 좋아한 호학(好學)군주였지만, 성격이 철두철미한 완벽주의자였고 사람을 한번 미워하면 끝까지 미워하는 편집증적인 병세도 보인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어려서 총명하게 공부에 열중할 때는 너무나도 예뻐했지만, 세자가 커면서 공부보다는 무예나 유흥을 더 즐기자 세자를 미워하는 것이 도를 넘어 벌레 보듯이 대했다. 영조의 편집증적인 지독한 미움과 증오에 시달린 사도세자는 급기야 정신이상증세 까지 보이다가 마침내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굶어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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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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