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적 임꺽정 1편
■ 의적 임꺽정 1편
임꺽정은 조선 중기 명종 임금 대에 양주(楊州)의 백정(白丁) 출신으로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巨叱正)이라고 불리우던 인물이다. 조선시대의 백정은 도살업, 유기제조업, 육류판매업 등에 종사하여 신분적으로는 노비가 아니지만, 그 직업이 천하다하여 노비보다 더 심한 천대를 받았다.
임꺽정이 등장할 무렵의 조선사회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실제로 명종대의 진정한 대도(大盜)는 임꺽정이 아니라 실권자 문정왕후의 혈육 윤원형(尹元衡)이었다. 윤원형은 명종의 외삼촌이자 문정왕후의 동기간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부정부패를 일삼고 있었다. 임꺽정의 난이 기록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1559년 황해도 지역의 지방 관리들은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친정 식구들이었다. 당시 그 지역은 극심한 흉년과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할 지경이었다. 가난과 전염병으로 쪼들린 농민들은 살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다가 도적이 되는 것이 기본 수순이었다. 임꺽정 역시 처음에는 단순히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도둑질을 일삼았다.
사회의 지배 계급인 양반들의 등쌀로 농촌이 극도로 피폐해져서 농민들은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연산군 시대부터의 호화 방종한 생활은 백성들의 피와 땀을 짜는 착취를 불러왔고, 그 후로도 잔재가 여전히 남아 가중한 세금은 그대로 시행되어 오고 있었다. 이것을 개혁하고 시정하자는 논의가 있기는 하였으나, 조종(祖宗)의 법을 함부로 고칠 수 없다는 핑계로 조정신하들은 이를 그대로 두었다. 백성에 대한 고질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이 밖에 군역, 부역 등의 부담과 함께 여러 가지 세금과 국경 수비의 수자리 등등은 농촌사회를 거의 붕괴 직전의 위기에까지 몰아넣었다.
이러한 농촌 피폐 현상은 자연히 도적들의 발호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적으면 사오 명, 많으면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씩 떼를 지어 돌아다니면서 토호와 부자들을 습격해서 그들의 재산을 털어 가곤 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집단이 황해도의 대적 임꺽정이었다. 임꺽정은 날쌔고 용맹한 리더십으로 불평분자와 무뢰배들을 규합하여 일대에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임꺽정은 청석골을 근거지로 황해도와 평안도는 물론 경기도까지 출몰하였다. 그들은 황해감사나 평안감사가 나라에 바치는 진상물을 털기도 하였고, 감사의 친척을 가장하여 수령들이 부정으로 축재한 재산을 빼앗기도 하였다. 임꺽정 무리들은 관청이나 양반, 토호의 집을 습격하여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인 재물을 도로 가져갔고, 심지어 과감하게 관청을 습격하는 등 공권력을 향해 항거하기도 했다. 이는 임꺽정 무리들이 일개 좀도둑이 아닌 농민저항 수준의 반란으로 세력이 커졌음을 말해준다. 민중들이 임꺽정에게 관군의 동향을 미리 알려주고 그들의 활약에 환호를 지른 것은 그들이 단순한 도적떼만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