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6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6편
정여립(鄭汝立) 역모사건은 당시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이 동인을 핍박하기 위해 확대 조작한 사건이다. 정철(鄭澈)은 이 옥사를 공정하게 처리한 것이 아니라 동인을 누르고 서인이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적인 감정이 그대로 표출됐다.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주도하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정철(鄭澈)은 본격적인 당쟁 시대를 연 장본인이기도 했다.
단재 신채호의 정여립에 대한 평가를 보면, 『정여립(鄭汝立)은 400년 전에 군신(君臣) 강상론(綱常論:삼강과 오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을 타파하려고 한 동양의 위인으로, 계몽사상가인 루소와 견줄 만하다. 하지만 루소와 같이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지만, 정여립(鄭汝立)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하면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17세기 영조 때 남하정이 당쟁에 관해 쓴 책인 《동소만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여립(鄭汝立)이 변승복의 꾐에 빠져 진안군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이 현감과 같이 두들겨 죽이고는 자살했다고 아뢰었다.』
정여립(鄭汝立)의 시체는 한양에 도착하여 능지처사 되었으며, 한 토막씩 잘린 다음 8도에 흩어졌다. 선조는 정여립(鄭汝立)의 집터를 파헤치고 숯불로 지져 그 맥을 끊고 연못으로 만든 다음, 제왕의 기운이 있다고 전해 오던 정여립(鄭汝立)의 조상 묘 터까지 파헤쳐 유골을 꺼내어 가루로 만들어 날려버렸다고 한다. 연산군 때 유행했던 쇄골표풍(碎骨飄風)이 여기서도 등장했다. 1584년부터 정권을 잡지 못해 울분에 차 있던 서인들은 정여립(鄭汝立)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인의 싹을 자르려고 했던 듯하다.
기축옥사로 인해 김시민, 이억기, 신립, 이순신 등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장수들을 이끌고 이탕개의 난을 평정했던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은 정여립과 9촌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였고,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은 정여립과 역모를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묘향산에서 끌려가 선조에게 친히 국문을 받았으며, 사명당(四溟堂) 유정은 오대산에서 강릉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 등 훌륭한 인사들이 고초를 겪었다. 역모 사건이 당쟁으로 까지 확대 되어 공안 정국으로 치닫게 되었고 피를 부르는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기축옥사는 조선 최대 비극 중 하나인 사건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500만이라고 하는데(노비와 천민을 합하면 1,000만명) 그 중 1,000여 명이 죽고 유배에 처해졌으면 엄청난 사건이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를 계기로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었다. 사건을 조작한 서인을 불구대천지 원수로 본 사람들은 북인(北人), 온건파는 남인(南人)이 되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진실이 채 밝혀지기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진실은 역사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