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1일 목요일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5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5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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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모반(謨反)사건은 말 그대로 역모를 준비한 사건이지 실제로 모반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또한, 확실한 증거는 없고 역모 관련자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던 일부 사람의 자백만 있었다. 정여립(鄭汝立) 역모사건의 최정점에는 길삼봉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정여립은 길삼봉 다음의 서열이라 했다. 전국에 비상망을 치고 괴수인 길삼봉 체포에 전력을 다했으나 조선이 망할 때까지 길삼봉은 체포되지 않았다. 그도 당연한 것이 길삼봉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정여립(鄭汝立) 하나만 가지고는 역모로 모함하기에 좀 모자란 듯하여 서인들이 조작해 낸 허구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여립의 모반사건은 조선왕조 최대의 정치 미스터리라고 한다. 정여립 모반사건은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작이냐, 실재냐 하는 첨예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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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모반(謨反)사건으로 야기된 기축옥사 당시 국문(鞫問:죄인 심문)을 지휘한 추국청(推鞫廳)의 책임자, 즉 위관(委官)이 서인 정철이었는지, 동인 류성룡이었는지를 두고도 현재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서인 정철과 동인 류성룡 두 사람 중 추국청의 위관이 누구였느냐에 따라 정여립 모반사건이 조작이냐 실재냐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인인 정철이 위관이었다면 서인과 동인 간의 권력 투쟁에서 비롯된 정여립 역모사건은 조작이 크게 의심되고, 동인 류성룡이 위관이었다면 진짜 역모사건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현재까지 정철이 위관이었다는 것이 정설(定設)이다.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추관은 정철(鄭澈)이었고, 백유함과 이춘영이 추국을 도왔다. 이들은 옥사를 주관하면서 서인(西人)인 자신들과 의논이 다른 자들을 모조리 연루시켜 죽였던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인물들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기축옥사(己丑獄事)의 가장 큰 피해자는 맑은 선비로 명성이 높았던 이발, 정개청, 최영경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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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鄭汝立)이 서인에서 동인으로 돌아서면서 동인의 실세(實勢) 이발(李潑)과 친해졌다. 이발(李潑)은 임금 앞에서 실시되는 과거인 알성시에 장원급제한 인재인데다가 혁명가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어서 정여립(鄭汝立)과 기질 상 잘 맞았다. 이발(李潑)의 부친은 전라관찰사를 지낸 이중호이고, 형제들이 모두 벼슬에 나아가 이발은 아주 괜찮은 집안 출신이었지만, 정여립과 가깝게 지냈다 하여 혹독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이발(李潑)의 친족이 모두 잡혀와 고문을 받았는데, 이발의 어머니 윤씨는 나이가 82세였으나 압슬형을 받고 죽었으며, 겨우 여덟 살이었던 이발(李潑)의 아들도 선조의 명으로 맞아 죽었다. 압슬형이란 널빤지 위에 날카로운 사기 조각을 깔고 그 위에 무릎을 꿇게 한 다음, 무릎 위에다 무거운 돌을 올려놓는 형벌이다. 죄인이 고문을 해도 죄를 불지 않으면 사람이 올라가서 밟기도 하는데 여섯 명까지 올라갔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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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