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1일 목요일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4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4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4편

정여립(鄭汝立)이 대동계를 조직해 전주 지역에서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선조 20년, 전라도 해안지방에 왜구가 쳐들어왔다. 당시 전주부윤이던 남언경은 여러 고을에 병력파견을 요청했으나 여의치 않자, 정여립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정여립(鄭汝立)은 즉시 수백 명의 대동계 계원들을 집합시키고 믿을 수 있는 무사를 출정시켜 왜구를 물리쳤다. 뒤에 남언경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는데, 그는 대동계(大同契)를 왜구를 대비한 지역 방어조직으로 보았고, 허약한 국가의 방위체제를 보안하기 위하여 사병(私兵)을 양성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진보 지식인이었던 정여립(鄭汝立)은 풍수와 천문지리,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당시의 성리학 관점에서 볼 때 이런 것들은 모조리 이단이었다. 거기다가 대동계(大同契) 계원들까지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있으니, 서인들이 보기에는 영 꺼림칙했으므로 역모로 몰아 죽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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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년(1589년) 10월,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수 한웅인 등이 고변을 했다. 정여립(鄭汝立)이 전라도에서 역모를 꾸미는 것을 안악에 사는 조구가 밀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선조는 즉시 금부도사를 보내 정여립(鄭汝立)을 체포하도록 했다. 그 무렵 황해도 안악에 있던 변승복은 조구가 정여립(鄭汝立)을 고변했다는 말을 듣고 금구까지 나흘만에 달려가 정여립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변승복은 별명이 호랑이라고 알려질 만큼 용맹한 인물로 정여립의 측근이었다. 소식을 들은 정여립(鄭汝立)은 아들 정옥남, 그리고 박연령의 아들 박춘룡을 데리고 밤을 틈타 도망쳤다. 이튿날 금부도사가 들이닥쳤으나 정여립(鄭汝立)은 이미 도망친 후였고, 그 집에는 승려 지영과 사장, 그리고 창고에는 백미 200석과 잡곡 100석 정도가 있을 뿐 이었다. 당시 정여립(鄭汝立)은 동인에 속해 있었고, 동인들은 아무도 정여립의 모반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금부도사가 정여립(鄭汝立)의 집에서 편지들을 모조리 압수해 한양으로 가져갔다. 이로써 정여립(鄭汝立)과 편지를 주고받은 자들은 모두 역모의 연루자로 몰려 애매한 죽임을 당한 자가 지천으로 생겨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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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구에서 도망친 정여립은 진안 죽도 산골에 들어가 숨었으나 진안 현감 민인백의 포졸들에게 발견되었다. 산골짜기에 들어가 마른 풀을 쌓아놓고 그 속에 숨어 있다가 관군이 사면으로 포위해 들어오자, 칼을 빼어들고 관군에게 달려들려 했다. 이에 변승복이 말렸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가 자결할 것이지 관군이 무슨 죄가 있소? 우선 나부터 죽여주시오." 이 말을 들은 정여립(鄭汝立)은 변승복을 칼로 쳐서 죽이고 아들 옥남이도 베었으나 칼이 빗나가 옥남이는 죽지 않았다. 진안 현감 민인백이 투항을 권고하자 정여립(鄭汝立)은 칼자루를 땅에 꽂아놓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스스로 칼끝에 목을 찔러 죽었다고 한다. 근데 여기서 의문인 점은 칼자루를 어떻게 땅에 똑바로 꽂을 수 있었을까? 자살을 위장한 타살이 아니었을까.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