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1일 목요일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3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3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3편

동인으로 전향한 정여립은 서인으로부터 비난 받았고 선조는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선조는 정여립이 당적을 바꾸고 이이를 비판하는 행동을 보고 건방지고 간사한 사람이라 하여 좋아하지 않았다. 선조가 자신을 꺼리자 정여립(鄭汝立)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현재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동곡마을에 낙향하여 인근 지역의 관리나 선비들과 교류하며 지냈다. 한동안 김제에서 지내던 정여립은 전라북도 진안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지역에서 정여립의 이름이 점차 알려지자, 진안 죽도에 서실(書室)을 지어놓고, 자기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체제에 도전하고 평등한 개혁을 실천하기 위해 만민평등의 모임인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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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하면서 당시로서는 놀라운 사상을 주장했다. 정여립의 사상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보아도 놀라울 정도로 선진적이었다. 그는 신분혁파를 주장하고 인권을 중요시했다. ‘천하는 만민의 것’이라는 이른바 천하공물설은 서양의 사회계약론 보다 더 앞서 나온 계몽사상인 것이다. 정여립은 유교로 지배하는 조선 사회에서 보기 드문 혁명가였다. 대동계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대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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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은 반상(班常:양반과 상민)의 귀천과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차별, 남녀의 차별도 없는 대동계(大同契)를 만들어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하였고 무술을 연마하기도 했다. ‘천하는 만민의 것’이라는 대동사상(大同思想)은 당시의 정치 이념이자 사회통념인 유교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대동계의 대동(大同)이란 대동소이, 대동단결, 태평성세의 의미로 쓰인다. 즉 아무 차별이 없고 모두 같이 잘 사는 이상사회의 의미인 것이다.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그저 양반의 수탈 대상일 뿐, 사람이 아니었다. 정여립은 이런 사회를 엎어버리고 싶은 생각을 가진 선각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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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鄭汝立)은 기존의 신분질서에 도전하고 백성중심의 정치체제가 실현되는 길을 모색하다가 정치적 희생을 당한 불운한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그 시대에 왕권 세습에 문제 제기를 하기도 했던 그는 지나치게 시대를 앞선 지식인임에 틀림없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