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2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2편
정여립(1546년∼1589년)의 본관은 동래, 자는 인백(仁伯)으로 전주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무예와 활쏘기에 뛰어나고 총명하여 한 번 배우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밤을 새워 책을 읽을 만큼 책을 좋아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에 두루 능통했으며, 글씨와 시에도 능해 전주 일대에서는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언변이 뛰어난 호남(好男)인데다가 사리분별력이 있어 강직하고 비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수의 기록에 정여립을 조선 중기의 끔찍한 모반자(謀反者)로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를 두고 전주부윤이며 양명학자였던 남언경은 “정공(鄭公)은 학문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재주도 다른 사람이 가히 따르지 못할 바이다.”라고 하면서 정여립을 주자에 비유하였고, 이이 역시 “호남에서 학문하는 사람 중 정여립이 최고”라 하였다. 이렇듯 정여립은 당대의 뛰어난 인물이기는 하였으나, 그가 가진 남다른 재주와 개혁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비운의 주인공이 된 것은 아닐까.
정여립(鄭汝立)은 선조 3년 24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를 했다. 조선시대 평균 급제나이가 30세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른 성공이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도성으로 올라간 정여립(鄭汝立)은 서인 이이(李珥)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이(李珥)의 문하에는 인재가 넘쳤으나 그 중에서도 정여립(鄭汝立)은 재주가 뛰어나 다른 사람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이(李珥)는 그의 재주를 아껴 기회가 닿는 대로 조정에 천거했다. 그런데 1584년 서인의 거두 이이(李珥)가 사망했다. 이이는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으며, 마음이 그리 넉넉한 편이 못 되어 경솔하고 편견과 아집이 있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생전에 이이(李珥)를 신뢰했던 선조도 이이가 죽고 나자 그에 대한 신뢰감이 점점 사라져갔다. 동인들은 이이(李珥)를 탄핵하며 공격했다. 정여립도 이에 가세하여 율곡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이이(李珥)의 추천으로 조정에 발을 디딘 정여립(鄭汝立)이 스승을 공격하기 시작한 이유는 확실치 않다.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죽음 직전의 이이(李珥)가 한사코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와 그의 기질이 동인의 영수인 이발(李潑)과 좀 더 잘 맞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어쨌든 이이(李珥)는 겉과 달리 속으로는 정여립(鄭汝立)의 과격성을 많이 걱정한 듯하다. 이조전랑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1년 후 조정에 다시 들어온 정여립(鄭汝立)은 경연(經筵:어전에서 경서를 논함)에서 서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스승인 이이(李珥)를 나라를 망친 소인 이라고 혹평하며 스승을 배반했다. 동인으로 변신하여 당적(黨籍)을 바꾼 것이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