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1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1편
16세기 후반, 선조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조선은 창건 이후 200여 년 동안 큰 전란(戰亂)없이 평화가 지속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 상 유례없이 긴 평화의 시대였다. 하지만, 선조가 즉위하고부터 시작된 붕당정치의 폐단은 날로 심해져 부국강병보다는 당리당략을 위한 당쟁을 일삼느라 아무 준비도 못한 채 임진왜란이라는 큰 국난을 겪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1589년(선조 22년) 기축옥사(己丑獄事)을 촉발시킨 정여립(鄭汝立, 1546~1589) 모반(謀反)사건이 일어났다. 1589년(선조 22년)에 시작하여 1591년(신묘년, 선조 24년)까지 약 3년 동안 계속된 기축옥사(獄事)는 서인에 의해 동인이 몰락하게 되는 피의 숙청사건을 말한다. 특히 정여립이 호남출신이라 동인 중에서도 호남출신 유학자들의 씨를 말릴 정도로 큰 피해를 주었다. 기축옥사는 조선 시대 4대 사화, 무오사화(연산군 4년, 1498년), 갑자사화(연산군 10년, 1504), 기묘사화(중종 14년, 1519년), 을사사화(명종 1년, 1545년)에서 희생된 500여 명의 두 배가 넘는 약 1천여 명이 희생된 조선왕조 500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대사건이었다. 기축옥사가 사화(士禍)로 불리지 않고 옥사(獄事)로 불리는 이유는 선비들이 주로 죽임을 당한 사화보다 피해 계층이 매우 넓고 다양했기 때문이다.
기축옥사에서 위관(委官:조사관)으로 임명 된 송강 정철은 정승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한 숙청을 하여 문인(文人)으로서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송강 정철은 왜 이리 잔인한 숙청에 앞장섰을까. 선조는 정철을 위관(委官)으로 삼아 옥사를 다스리게 했는데, 서인 중에서도 강경파에 속했던 정철은 동인 중 평소 과격한 언행을 했던 인사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는 등 매우 가혹하게 다스렸다. 그 때문에 그는 사건이 끝난 후 동인들에게 ‘동인백정’이라는 말로 미움을 받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기축옥사는 그 실체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우리에게 많은 의문점을 던지고 있지만, 아마도 당시 조선왕조의 당쟁이라는 정치 구조 속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고, 지역 내 사림 사이의 갈등과 개인적인 감정 대립이 서로 얽혀 빚어진 결과로 보인다. 1천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은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대동계와 당시로서는 위험한 정여립의 사상, 동서분당의 권력투쟁, 정철의 개인적 보복심리 등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섞여져 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