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1일 목요일

선조宣祖 3편

■선조宣祖 3편

■선조(宣祖) 3편

정유재란이 끝난 후인 1600년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宣祖)는 2년 뒤 51세가 되던 해에 김제남의 딸(19세)을 새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녀가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역사 드라마 속에서 ‘인목대비’로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4년 후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적자(嫡子)인 영창대군을 낳으면서 후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선조(宣祖)의 맏아들 임해군과 둘째 광해군은 공빈 김씨 소생이었고, 셋째 아들 의안군과 넷째 신성군은 인빈 김씨 소생이었다. 그리고 인목왕후(仁穆王后)가 낳은 영창 대군이 바로 선조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정비 소생이었으니, 이때부터 선조(宣祖)의 마음은 광해군에게서 떠나기 시작했다.

선조(宣祖)는 재위 41년을 맞으면서 병세가 심해졌다. 가망이 없음을 안 선조는 전교(傳敎)를 내리기 위해 세 정승을 불렀다. 이때 영창대군의 나이는 겨우 2살이었다. 아무리 정비(正妃) 소생의 적자(嫡子)라 해도 세자의 직무를 16년이나 그것도 국난을 극복하고 전후 수습 등의 난제(難題)를 잘 수행해 온 34세의 세자가 있는데, 이를 폐하고 두 살배기를 세자로 책봉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선조(宣祖)가 죽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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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宣祖)의 죽음에 대해 광해군이 왕이 되는 것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북인(北人)이 기록한 선조실록에는 선조가 병으로 죽었으며, 마지막 임종을 왕비 인목대비가 지켰다고 했다. 그런데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 측의 기록인 선조수정실록에는 선조(宣祖)가 승하하는 당일 미시에 광해군(光海君)이 찹쌀떡을 올렸는데, 선조가 이것을 먹고 갑자기 기가 막히며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상황을 두고 이렇게 기록이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당연히 집권세력 당(黨)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이 주도해서 다시 기록한 선조수정실록은 역시 승자의 기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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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도 ‘선조 독살설’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입시(入侍)했던 의원 성협이 “임금의 몸이 이상하게 검푸르니 바깥소문이 헛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