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종과 김인후 1편
■ 인종과 김인후 1편
조선의 왕 중 가장 짧은 기간 동안 왕위에 있었던 사람은 고작 8개월 재위한 조선의 12대 왕 인종(1515~1545년)이다. 왕으로서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인종은 사실 준비된 왕이었다. 1515년 2월 중종과 장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나 1520년 6세의 나이에 왕세자로 책봉됐다. 25년간 왕세자로 있다가 1544년 중종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인종은 세자로 있던 시절 사림파를 적극 중용했는데, 그 핵심 인물이 스승이던 김인후(金麟厚, 1510∼1560년)였다.
16세기는 조선 사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은 신진 세력인 사림파가 정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비록 훈구파와 정치적 대결에서 패배하면서 몇 차례의 사화로 피해를 당했지만, 사림파는 시대가 흘러가면서 제자가 양성되면서 자연적으로 성장했다. 사림파는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됐지만 호남 지역에서도 주목할 만한 학자들이 나타났는데, 김인후가 그 대표자이다. 그는 장성에서 성장해 호남 지역에 성리학을 전파한 학자였다.
‘시경’을 탐독하고 성리학에 전념하던 김인후는 22세던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이황과 함께 공부했는데, 이황은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김인후 한 사람뿐이다”라고 할 만큼 김인후에게 돈독한 우의를 표현했다. 1540년 31세로 별시문과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관직에 진출했다. 1541년에는 독서당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조선시대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줘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를 지냈으며, 이후 홍문관 저작, 시강원 설서, 홍문관 부수찬 등을 지냈다.
김인후는 관직 생활을 하면서 1519년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조광조 등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인종 대 이후에는 주로 고향인 장성에 은거하면서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조광조 등의 학맥을 이으면서 그 한계를 극복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영남에 이황이 있다면 호남에 김인후가 있다’고 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인종이 세자로 있던 1543년 4월 세자를 보필하는 시강원의 설서(說書)가 된 김인후는 한 달에 10일을 궁궐에 머물면서 인종의 학습을 도와줬다. 시강원의 여러 스승 가운데서도 인종이 김인후를 특히 믿고 따랐다. 하지만 인종과 김인후의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543년 12월 김인후가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을 자청해 지방으로 내려갔고, 인종은 다음 해 11월 즉위했다가 1545년 7월 승하했기 때문이다. 정작 왕이 된 인종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필할 기회는 없었다. 김인후는 인종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탕약을 만들기 위해 약방에 참여하려 했지만 결국 인종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