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산군과 갑자사화 1편
■ 연산군과 갑자사화 1편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가 폐위된 것을 안 것은 즉위한 다음해 3월 선왕(성종)의 묘지문을 보면서였다. 이때부터 연산군은 자식된 당연한 도리로 생모의 죽음을 애도하고 명예를 회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윤씨 묘를 이장하고, 그녀를 모시는 사당을 효사묘(孝思廟)로, 능을 회릉(懷陵)이라고 정하였다. 오늘날 서울시 동대문구 회기동 일대이다. 이때도 당시 젊은 삼사의 언관들은 몇 년을 두고 이를 반대하였다. 물론 언관들이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법으로써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이들은 반대하면서 그 근거를 선왕의 뜻이 아니라는 것으로 일관했다. 하루는 대사헌 김심이 휘하의 여러 대관들을 거느리고 연산군 앞에 가서는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하고 고집하여 뜰에서 10여 일이나 버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은 연산군의 의도대로 시행되고야 말았다.
그러나 계속된 젊은 언관들의 반대는 왕조국가의 절대 지존인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평소 연산군은 삼사의 언관들을 비롯한 사림들을 왕을 능멸하는 존재라 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젊은 언관들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는 연산군뿐만이 아니고, 이극돈·유자광·노사신·윤필상·한치형 등의 훈구세력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갈등의 골은 싶어만 갔고,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빌미로 훈구파와 사림파의 충돌이 일어났고(무오사화), 많은 사림들이 죽임을 당하고 낙향함으로써, 결과는 훈구파의 승리로 돌아갔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로 자신에게 잔소리를 하던 사림들을 숙청하고 조정을 장악하였다. 무오사화 이후 나타난 가장 뚜렷한 주요 현상은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위축이었다. 이제 조정에는 더 이상 왕에게 간언하고 학문을 요구할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훈구대신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연산군의 향락을 지켜만 보거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연산군의 비행을 막을 신하들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연산군의 향락은 더욱 더 극심해졌다. 삼사가 제 구실을 못하면서 국왕(과 대신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구상을 한결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연산군은 돌이킬 수 없는 우(愚)를 범하게 되었다.
그는 강화된 왕권을 정치나 제도 개혁 같은 곳이 아닌 사치·사냥·연회·음행 같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곳에 집중했다. 연산군은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능상(凌上:깔보다)의 척결을 통한 전제적 왕권의 행사라는 정치적 목표의 달성이라고 판단하였다.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제거되자 조정에는 언론 기능이 상실되었고, 연산군은 절대군주로서의 위상을 높여갔다. 날마다 연회를 열어 전국의 기생들을 불러 모았으며, 향락과 패륜을 일삼았다. 방탕하고 사치스런 생활로 급기야 국고가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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