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산군과 갑자사화 2편
■ 연산군과 갑자사화 2편
이 후 연산군은 실로 폭군이라 불리울 만한 폭정을 이어나갔다. 연산군은 사냥·연회·음행 등을 더욱 거침없이 즐겼다. 또한 그런 방종을 외부에서 알지 못하도록 궁궐 주변의 민가를 철거하고, 철거 후에 그곳에 금표를 설치하여 일반 백성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들어오는 자들은 사형에 처하였다. 실제로 천동이라는 사람이 금표 안에 들어오자 그를 효수하여 사람들이 보도록 하였다. 또 금표로 인하여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 불만을 품자 그들을 모두 고문하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국왕에 관련된 발언도 철저히 통제했다. 이런 현상은 재위 8~9년부터 크게 증가했다.
또한 전국에서 얼굴이 예쁘고 노래를 잘하는 기생들을 뽑아 올리라고 명하여 이들에게 흥청, 운평, 광희라는 이름을 붙였다. 처음에는 흥청 3백 명, 운평 7백 명을 뽑아 올리라고 명하였으나, 그 수를 계속해서 늘려 9천여 명까지 늘어나기도 하였다. 연산군은 이들과 향락을 즐기면서 그 비용을 국고에서 충당하고, 심지어 흥청의 가족들에게까지 돈을 주어 몸을 치장하도록 하였다. 곱게 단장하지 않은 기녀는 의금부에 가두기도 하였다. 지금의 ‘흥청거리다’라는 말은 연산군대의 기생 ‘흥청’에서 유래된 것이고, 흥청이 나라를 망쳤다는 의미로 ‘흥청망청’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보다 못한 내시 김처선이 술에 취에 임금을 욕하자, 연산군은 즉시 김처선을 하옥하여 사사시켰다. 김처선의 재산을 모두 다 빼앗고 그 집을 연못으로 만들어 버렸다. 또한 양자(養子)를 비롯하여 칠촌까지 벌하고, 김처선 부모의 무덤을 뭉개기도 하였다. 한편 연산군은 자신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에게 애정을 느껴 국가재정으로 많은 쌀과 콩 등을 하사하기도 하였는데, 마침내 큰어머니를 겁탈하기까지 하였다. 박씨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비애감을 느껴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이는 사실여부가 확실치 않다. 이전에서도 밝혔듯이 중종 때 쓰여진 ‘연산군일기’의 내용은 연산군을 천하의 몹쓸놈(?)으로 만들기 위해 다소 왜곡과 과장이 있는 듯하다.)
연산군의 방만한 국정운영과 절제 없는 사치와 향락으로 국고는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조선은 몇 년간 큰 흉년을 겪게 되어 국가 재정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향락을 그칠 생각은 하지 않고,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했던 공신전(세습토지)을 다시 거두어 재정을 충당하고자 하였다. 국가재정의 부족으로 훈구세력들의 경제권마저 위협 당하자, 이때까지 국왕의 비위를 맞추던 훈구세력들이 왕에게 간언(諫言)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연산군이 곱게 볼 리가 없었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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