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산군과 갑자사화 3편
■ 연산군과 갑자사화 3편
나라는 연산군 편에 선 궁중세력과 부중세력훈구세력이 두 편으로 갈라져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부중파를 제거하고 조정의 권력을 잡으려고 음모를 꾸민 자가 바로 임사홍이었다. 그는 연산군의 복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예종과 성종의 외척으로 척신세력이던 임사홍(任士洪)은 윤씨의 폐비와 사사(賜死)에 얽힌 전말을 연산군에게 밀고하였다.
윤씨의 폐비론을 가장 강력하게 들고 나왔던 사람은 윤씨의 시어머니(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였다. 윤필상 등 훈구 세력도 이를 강력하게 지지했고, 김종직 문하의 사림 세력까지 폐비론에 가세했다. 당시 네 살이던 연산군은 뒤이어 왕비가 된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를 어머니로 알고 자랐으며, 생모 윤씨의 폐비 및 사사에 얽힌 구체적인 정황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 후폭풍은 엄청났다. 마치 불씨에 기름을 부은 것 같은 꼴이었다. 평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이를 마무리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연산군은 먼저 선왕의 후궁이었던 엄숙의와 정숙의를 처벌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사약 회의에 참여했거나 또는 이를 힘써 간하지 못한 조정신하들은 물론, 앞서 무오사화에서 죽음을 면한 선비들까지도 협조자로 몰아 죽였다. 사약회의에 참석했던 신하로서 이미 죽은 한명회·정창손 등은 무덤을 파고 그 시신을 베었으며(부관참시), 생존했던 윤필상·한치형·이극균·성준 등과 사림파의 잔존자들은 모두 극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연산군이 모친 윤씨를 다시 왕후로 추존 복위하려 할 때, 아무도 간하는 신하가 없었다. 오직 권달수와 이행이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했으나, 사리를 따질 리 없는 연산군은 대노하여 즉시 권달수의 목을 베고, 이행을 귀양보냈다. 연산군의 숙청 작업은 1504년 3월부터 무려 7개월 동안이나 계속됐다. 이를 갑자사화(甲子士禍)라고 한다. 연산군은 무오사화 때보다 훨씬 많은 인사들을 처단하여, 훈신 세력과 남아있던 잔여 사림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할 수 있었다.
무오사화가 훈구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의 상호대립에서 생긴 것이라면, 갑자사화는 궁중 중심의 세력과 훈구세력 일파와의 충돌로 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갑자사화는 표면상 생모 윤씨의 폐위, 사사 사건으로 인한 연산군의 포악하고 잔인한 복수심에서 폭발한 사건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그 내역을 살펴보면, 조정 신하간의 암투가 이 사건을 조장하고 격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폐비 윤씨의 죽음이 갑자사화의 계기 및 명분은 될지언정 직접적 원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왕이 되기 전부터 어머니를 죽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마음 속으로 칼을 갈고 있다가 기회가 와서 사화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기에 ‘폐비 윤씨’가 원인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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