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산군과 갑자사화 4편
■ 연산군과 갑자사화 4편
1504년(연산군10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갑자사화는 희생자의 규모나 형벌은 무오사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게 진행되었다. 죄인들의 자식들도 모두 죽이고 부인들은 종으로 삼았으며, 사위들은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사형에 처할 대상자 중에 미리 죽은 자는 모두 시신의 목을 베도록 하고, 동성의 삼종(三從)까지 장형을 집행한 다음 여러 곳으로 나누어 귀양 보냈다. 그 과정에서 연산군은 왕권을 능멸한 이세좌와 윤필상 등에게는 쇄골표풍(碎骨飄風), 곧 뼈를 갈아 바람에 날려 버리는 형벌을 가함으로써 자손들이 제사조차 지내지 못하게 했다. 그와 같은 전대미문의 극형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국왕이라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또 특이한 점은 직접적인 극형과 함께 재산 몰수라는 경제적 처벌도 병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목적은 고갈된 재정을 보충하는 것이었다. 재산 몰수는 추쇄도감을 따로 설치할 만큼 철저히 진행되었고 대부분 국고로 귀속되었다.
갑자사화는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정치적 비극의 하나일 것이다. 갑자사화의 결과, 궁중 세력이 승리해 정권을 잡고, 신진사류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주원인은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씨 문제였으나, 내면으로는 왕권을 능멸하는 신권에 대한 연산군의 징벌적 성격이 짙었다. 폭력적인 사화로 견제세력을 제거한 연산군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오히려 정권의 정당성과 세력기반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갑자사화는 이후 국정뿐만 아니라 문화발전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사형을 받았거나 부관참시를 당한 사람들 중에는 역사상 명신과 대학자·충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성종 때 양성된 많은 사림이 수난을 당해 유교적 왕도정치가 침체하고 학계가 위축되었다는 점이다. 또 연산군의 폭정과 만행은 성균관과 사원(寺院)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한글로 연산군을 비난하는 방이 나붙자 훈민정음(訓民正音) 교습 및 사용을 금하는 한편, 한글 서적을 모아 불사르는 등 국문학 발전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20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을 참혹한 방법으로 처벌하는 거대한 폭력으로 신하들을 완벽하게 제압한 연산군은, 이후 자신의 욕망을 전혀 제한받지 않고 자유롭게 현실화할 수 있었다. 반정으로 폐위될 때까지 꼭 2년 반 동안 연산군이 보여준 행태는 황음(荒淫-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 사화를 계기로 더 심해진 연산군의 실정은 새로운 정치와 질서를 요청하게 되었고, 이로써 마침내 1506년(연산군 12년) 9월2일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게 되었다. 연산군의 12년간의 독재정치는 막을 내렸고, 폐위(廢位) 두 달 만인 1506년 11월 6일, 31세의 젊은 나이로 강화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폐위되기 전부터 천연두, 가슴통증, 안질, 이질, 치통 등 온갖 병을 앓고 있었다고 하는데, 역사 전문가들은 왕에서 쫓겨난 심리적인 충격이 더해지면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왕이므로, 그의 무덤 역시 왕릉이 아닌 묘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지 못했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