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종반정 1편
■ 중종반정 1편
연산군이 폐비윤씨 사건을 문제 삼아 일으킨 갑자사화는 임사홍, 신수근 등의 새로운 측근 세력을 등장시켜 기존 훈구세력의 기반을 탈취하려고 일으킨 사화였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측근 세력을 적극 등용해 친위 체제를 만들고, 언론기관인 사간원을 폐지하고, 정치 논쟁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경연(經筵)을 중지시켰다. 비판 세력이 대부분 제거된 상황이어서, 연산군의 방탕 생활은 더욱 심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연산(燕山君)군은 하늘이 왕에게 내리는 경고인 기상이변을 보고하지 못하게 했다. 재변(災變)에 대해 연구하는 관상감은 재변을 보고 했다고 해서 없애버렸고, 그 전에 홍문관과 사간원은 말이 많다고 이미 없애버렸다. 언로(言路)를 아예 막아버린 것이다. 이렇게 조정의 모든 절대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쥔 연산군(燕山君)이 할 일은 향락 밖에 없었다. 사냥을 위해 도성 밖 30리에 걸쳐 민가를 철거하고, 기생과 전국의 미녀들을 불러 연일 호화로운 잔치를 벌였으며, 그 경비를 마련하려고 백성들에게 과도한 공물을 바치게 했다. 훈민정음으로 쓴 비난 투서가 잇따르자, 훈민정음을 사용하거나 학습하지 못하도록 하고, 관련 서적을 불태웠다.
당시 연산군의 호사스럽고 환락적인 생활로 궁궐재정은 바닥이 나 있었다. 연산군시절 두 차례의 사화와 공포정치가 거듭되는 동안 훈구, 사림 할 것 없이 많은 신하들이 희생되었다. 창덕궁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성균관을 연회(宴會) 장소로 만들었고, 장악원을 개칭한 연방원(聯芳院)을 원각사(圓覺寺)에 두어 기생들의 모임 장소로 삼았다. 이처럼 연산이 유희와 환락으로 세월을 보내며 국정을 도외시하자 갑자사화로 큰 희생을 본 훈구파들도 연산을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다. 훈구 세력을 중심으로 반정(反正)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연산군의 행태를 비판하다 한직으로 좌천된 전 이조참판 성희안(成希顔)이 1506년에 마침내 거사를 계획했다.
성희안은 무신 출신인 박원종(朴元宗)과 신망이 높은 이조판서 유순정(柳順汀)을 끌어들이고, 연산군의 총애를 받는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辛允武), 군기시검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등을 포섭했다.
연산군 12년(1506년) 7월20일에 승평부부인 박씨가 여러 가지 추문을 남기고 죽은 후, 남동생 박원종은 하루하루를 울분 속에서 지냈다. 연산군의 아이를 배어 자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억울하게 죽은 누이의 복수를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