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종반정 2편
■ 중종반정 2편
그러던 어느 날 박원종에게 신윤무가 찾아왔다. 같은 무과 출신에다 동네 주민이라 그들은 이전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신윤무는 연산군 축출 의사를 은근히 내비쳤다. 누이의 죽음 이후 연산군 축출을 고대하던 박원종은 신윤무의 말을 듣자마자 크게 공분(公憤)하였다. 그날 저녁 성희안이 박원종을 찾아와 마주앉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평생을 충성과 의리로 살았으니 마땅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대장부의 생사는 천명에 달렸으니 어찌 경각에 달린 종묘사직을 보고 구하지 않겠습니까?”라며 반정(反正:나쁜 임금을 폐하고 새 임금을 세움)을 결의했다. 반정 후에는 진성대군(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의 아들)을 옹립하기로 합의했다.
그날 이후 반정 계획은 박원종과 성희안에 의해 착착 진행됐다. 박원종은 무사들을 포섭했고, 성희안은 문신들을 포섭했다. 박원종은 조정 대신들의 의견을 하나씩 물었는데, 조정 대신들 대부분은 망설임 없이 반정계획에 동참하였다. 마침 연산군이 며칠 후 개성으로 행차하겠다는 명령을 공포했다. 박원종과 성희안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연산군이 한양을 비운 사이에 거사를 하면 성공 확률이 높기에 그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연산군 12년 9월2일이었다.
박원종은 거사를 며칠 앞두고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진성대군)의 장인인 신수근을 찾았다. 아직 중종에게는 반정계획을 알리지 않은 상황이라, 그의 장인인 신수근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신수근과 장기를 두던 박원종은 은근슬쩍 궁(宮)을 들어 바꿔놓았다. 장기의 궁은 왕이기에 궁을 바꿔놓는 것은 곧 왕을 바꾸겠다는 암시였다. 그때 신수군은 장기판을 밀치며 “내 머리를 베라”고 외쳤다. 절대 찬성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신수근은 연산군에게 알리지는 못했다. 박원종이 새로 옹립하려는 왕이 자신의 사위였기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것이다.
전 이조참판 성희안은 지중추부사 박원종, 이조판서 유순정, 군자감부정 신윤무 등과 함께 왕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을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왕의 행차가 취소되면서 거사에 차질이 생겼다. 이때 호남 지역에서의 연산군 폐위 거사 격문이 서울에 나돌게 되면서 결국 당초 계획을 강행하였다. 연산군(燕山君) 12년 9월 1일 밤!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 반정 3대장은 반정(反正)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조선 개국 이래 최초로 신하가 임금을 갈아치우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반정군이 궁으로 들이닥치자 연산군(燕山君)을 위해 나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박원종은 신수근, 임사홍 등 극소수의 연산군 측근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신하들의 호응을 얻어 경복궁에 무혈 입성하였다. 사태를 파악한 시종이나 내관들, 갑사들 모두 도망가 버린 궁궐에는 연산군만이 남아 있었고, 연산군은 옥새를 내어 놓으라는 반정군에게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이 순순히 옥새를 내 놓고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한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