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모를 겪은 창경궁 1편
■ 수모를 겪은 창경궁 1편
창경궁의 원래 이름은 조선왕조 세 번째 궁궐로 지어진 수강궁이다. 세종대왕이 아버지 태종을 위해 창덕궁 동쪽에 지은 궁이다. 9대 임금 성종 대에 이르러 왕실 어른들을 모실 공간이 부족해지자 수강궁을 크게 확장했다. 그 당시 성종의 할머니 정희왕후 윤씨(세조의 왕비), 그리고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추존된 덕종의 왕비), 작은 어머니이자 양어머니인 안순왕후 한씨(예종의 계비) 등이 생존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수강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창경궁으로 이름을 바꾸어 이후 창경궁은 여인들의 공간이 됐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의 홍화(弘化)란 ‘백성들을 좋은 쪽으로 교화한다’는 뜻이다. 경복궁의 광화문, 창덕궁의 돈화문 등 모든 궁궐 정문에는 될 화(化)자가 들어가 있다. 이는 백성들을 두루 폭넓게 교화시켜 나라를 이끌어 가겠다는 당대 통치자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
모든 궁궐은 풍수지리 상 배산임수(背山臨水)로, 궁궐 뒤쪽에 산을 두고 앞쪽에 물이 흐르도록 하였다. 이 때 궁궐 앞을 흐르는 개울은 신성함과 벽사(闢邪)의 의미를 담아 금천(禁川)이라 했고, 돌다리는 금천교(禁川橋)라 불렀다. 창경궁 금천교의 다른 이름은 옥천교이고, 창덕궁의 금천교는 비단처럼 맑은 물이 흐른다는 뜻의 금천교(錦川橋)라 불렀으며, 경복궁의 금천교는 영제교(永齊橋)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궁궐의 전각(殿閣:궁전과 누각)은 대부분 남향이다. 그러나 창경궁의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 등 일부 전각들은 동향(東向)이다. 이는 임금이 정사를 보기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왕실 어른들의 처소로 건립됐기 때문에 특별한 격식에 얽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반적으로 궁궐을 출입하기 위해서는 세 곳의 문을 거쳐야 하는데, 창경궁은 홍화문과 명정문으로만 배치가 돼 있는 것도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
궁궐은 쓰임새에 따라 대략 외전, 내전, 궐내각사, 동궁, 후원, 동조 등 여섯 공간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외전은 법전(法殿)과 편전(便殿)을 가리키는데, 나랏일을 논의하고 처리하거나 나라의 공식행사를 거행하는 공간을 통틀어 말한다. 내전은 임금과 왕비의 일상생활 공간이며, 궐내각사는 임금의 명을 받아 나랏일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모여 업무를 보는 일종의 ‘정부종합청사’인 셈이다. 후원은 대개 궁궐 뒤쪽에 자리해 왕실의 휴식이나 행사, 임금과 왕비가 백성들의 생활 체험을 하던 다목적 공간이다. 동궁은 세자의 생활과 학문 공간, 동조는 왕실 어른인 대비마마의 처소를 가리킨다. 창경궁도 여기에 준해 궁궐 격식에 맞추어 여러 공간들이 들어서 있고, 특히 창덕궁과 한 궁궐처럼 사용되다 보니 후원을 공동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