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릉王陵 1편
■ 왕릉(王陵) 1편
왕릉은 대개 왕과 왕비의 무덤까지를 포함한다. 왕과 왕비(정비)의 무덤을 일컬어 능(陵)이라고 하였고, 왕의 사친(私親)이나 왕세자(세자빈포함)의 무덤은 원(園) 이라고 칭하였다. 사도세자의 무덤은 원래 현륭원(顯隆園)이었다가, 장조 (莊祖)로 추존되면서 융릉(隆陵)으로 능호(陵號)가 바뀐 것은 능과 원의 위상 차이를 보여준다. 이외에 왕으로 있다가 폐위된 연산군이나 광해군의 경우에는 대군·공주·옹주·후궁 등의 무덤처럼 묘(墓)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왕릉은 단순한 왕의 무덤이라는 측면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무덤을 조성한 지역과 곁에 묻힌 인물을 통해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압축적으로 살펴볼 수 있고, 왕릉 주변에 조성된 석물을 통해서는 당대의 건축과 미술의 흐름까지도 읽을 수 있다. 조선시대 왕릉 조성에서 가장 크게 고려된 것은 풍수지리와 지역적 근접성이었다. 풍수 지리적으로 명당(明堂)이면서도 서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이 왕릉 조성의 적합지였다. 후왕(後王)들이 선왕(先王)의 능을 자주 참배하려면 우선 거리가 가까워야하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왕릉 대부분이 서울과 구리, 고양, 파주 등 경기 북부 지역에 분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상대적으로 한강 이남에 조성된 왕릉(태종의 헌릉, 세종의 영릉, 단종의 장릉, 성종의 선릉, 중종의 정릉, 효종의 영릉, 정조의 건릉, 순조의 인릉)이 적은 것은 뱃길을 이용하는 데 따르는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또한 동구릉(東九陵)이나 서오릉(西五陵)처럼 왕실의 무덤이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은 이 지역이 명당이라는 점과 함께 선왕의 무덤에 함께 묻히고 싶어 하는 후대 왕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조선시대 왕릉은 죽기 전 왕이 뜻하는 대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무덤을 만드는 주체인 후대 왕의 생각과 정치적 상황, 신하들의 의견 등 다양한 변수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릉을 조성하는 과정에는 기본적으로 풍수지리적인 측면 외에도 정치적인 이해관계, 정비와 계비의 갈등 등 다양한 변수들이 큰 영향을 미쳤다. 보기에는 그냥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있는 왕릉들은 저마다의 역사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조선의 왕들은 선왕의 무덤 참배를 국가의 중요행사로 여겼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을 양주에서 수원(화성)으로 옮긴 뒤 매년 아버지 묘소를 참배했으며, 그때마다 과거시험과 경로잔치를 열었다. 이것은 단순한 아버지에 대한 추모인 것이 아니라 사도세자에 대한 존숭(尊崇) 작업을 통해 ‘죄인의 아들’이라는 굴레를 벗고 왕권을 강화하여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이 담겨 있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