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통죄와 숙정옹주
■ 간통죄와 숙정옹주
2015년 헌법재판소는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간통죄에 대하여 위헌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우리나라 형법에 있는 간통죄는 62년 만에 사문화(死文化) 되었다. 조선 500년 동안 공주님이나 옹주님 중에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분이 딱 한분 계시는데, 바로 간통죄로 사약을 받고 돌아가신 중종의 서녀(庶女) 숙정옹주(淑靜翁主)이다. 숙정옹주는 조선 제11대 왕 중종과 후궁 숙의 김씨 사이의 유일한 딸이다.
숙정옹주는 10살에 한 살 더 많은 능창위(綾昌尉) 구한(具澣)에게 시집을 갔다. 구한은 시문(詩文)에 능하고 문인화(文人畵)에도 뛰어났다. 성품이 온화하고 용모가 단아하였으며, 효도와 우애가 깊었다고 하나 안타깝게도 35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34살에 과부가 된 숙정옹주는 40살에 어머니인 문정왕후로부터 사약을 받고 죽었다. 사위와 간통(姦通)을 하였다는 이유에서다. 왕실의 숨기고 싶은 이런 일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의외의 일이다.
옹주가 죽은 지 2년 뒤, 그리고 모후인 문정왕후가 죽은 지 1년 뒤에 옹주의 배다른 동생 명종이 옹주의 큰 아들인 구사근에게 벼슬을 내리게 된다. 당시 사관(史官)은 이러한 임금의 처사가 매우 못마땅했던 것인지, 숙정옹주의 간통사건을 사초에 기록하였고, 결국 실록에도 실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명종임금은 왜 옹주의 아들에게 벼슬을 내렸을까? 관련 기록이 없으니 명종의 뜻은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모후인 문정왕후가 누나를 죽인 일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후인 문정왕후가 죽자마자 누나의 아들에게 벼슬을 내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간통죄는 과연 죽을 죄였던 것일까? 그건 아닌 거 같다. 조선시대 간통의 대명사하면 어우동이 떠오른다. 그런 어우동을 죽인 죄목은 간통죄일까? 아니다. 명나라 법률인 《대명률(大明律)》에 따라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하여 바로 개가(改嫁)한 것’이다. 당시 임금인 성종이 어우동을 죽이려고 할 때, 영의정 정창손뿐만 아니라 예절을 관장하는 예조의 부장관인 예조참판 김순명도 사형에 반대했다. 그럼에도 성종은 어우동의 사형을 강행하였는데,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형벌을 가볍게 쓰는 게 성군(聖君)의 지표인데, 이런 걸 너무나 잘 아는 성종이 어우동을 앞장서서 죽였으니 말이다. 이 이해하기 힘든 처사 때문에 성종이 어우동과 은밀한 스캔들이 있었다는 구설(口舌)이 있었던 것도 그럴듯하게 들린다.
암튼 어우동에게 사형을 내렸을 때 실록에는 어우동 엄마의 발언을 실었다. “사람이 누군들 성욕이 없겠는가? 다만 내 딸이 남자를 좋아하는 게 유난히 심할 뿐인데......” 어찌 그게 죽을죄냐는 엄마의 항변이다. 어우동의 엄마도 남종과 바람이 나 쫓겨난 바 있다. 이들은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여인들일까? 아니면 성의 자유를 갈구하는 앞선 선각자였을까?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