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장國葬 4편
■ 국장(國葬) 4편
산릉도감은 왕의 능을 조성하는 기관이다. 공조판서 등이 제조로 임명되고 왕이 승하 후 5개월 후에 있을 장례의식 전까지 왕릉조성을 마무리해야 한다. 산릉도감이 설치되면 지관이나 대신이 능을 조성할 지역을 결정하는데 이를 ‘택지(擇地)’라 한다. 때로는 왕이 생전에 직접 묻힐 곳을 정하고 무덤을 만드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수릉’이라 한다. 풍수지리를 중요시했던 조선사회에서 택지는 중요한 사안으로 정치적 대립이 있기도 했다. 회의를 거쳐 공사일정과 필요인력을 정하여 왕릉 조성을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는 백성들에게 부역의 형태로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으나 17세기 이후 인력을 고용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태조의 건원릉을 조성할 때는 6,000~9,000명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3도감의 도제조(都提調:총책임자)는 좌의정이 맡았고, 장례에 관한 모든 일은 총골 처리했다.
시신을 넣는 관을 ‘재궁(梓宮:가래나무로 만든 국왕의 관)’이라 하는데, 왕이 즉위하는 해에 만들어서 1년에 한번 씩 옻칠을 한다. 그 뒤 왕이 죽으면 붉은 비단을 사방에 붙이고 네 모퉁이에 녹색 비단을 붙인다. 칠성판(七星板:관속에 까는 얇은 판자)을 까는 등 여러 가지 치장을 하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면 발인을 한다. 발인(發靷) 전, 출관(出棺)을 위해 빈전을 여는 절차로 ‘계빈의(啟殯儀)’라고 하는데, 곡을 하며 슬퍼하는 의식이다. 빈전에서 재궁이 능지를 향하여 움직이는 것을 ‘발인의’라고 한다. 궁을 떠나 정해진 능지로 가는 행렬을 ‘발인반차(發引班次)’라 하고, 국장행렬을 그린 그림을 ‘발인반차도’라 한다. 발인을 하면서 길에서 제사를 지내는 절차는 ‘노제의’라 한다. ‘대여(大輿)’는 궁궐문 밖에서 능까지 왕의 시신이 담긴 관을 운반하는 가마다. 가마를 메고 가는 사람을 ‘담배군’이라고 하는데, 정조 발인에는 2,200명이 동원되기도 했다고 한다. 왕의 재궁을 왕릉에 안치한 후에 신주(神主:위패)를 받들어 궁으로 돌아와 혼전(魂殿)에 모신 후, 3년 상이 끝나면 종묘로 모신다. 이를 ‘부묘(祔廟)’라 한다. 왕은 삼년상이 끝나는 대로 부묘하고, 왕이 살아생전에 죽은 왕비는 삼년상이 끝나더라도 계속 혼전에 모셔졌다가 왕의 삼년상이 끝나면 함께 부묘하였다. 부묘의 준비와 진행은 부묘도감이 담당하였다.
국장이 끝나면 국장도감, 빈전도감, 산릉도감 등 각 기관에서는 국장을 치를 때마다 진행하는 업무내용을 세밀하고 자세하게 기술하였다. 즉, 국장을 한번 치르고 나면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 『빈전도감의궤(殯殿都監儀軌)』,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라는 3종의 의궤가 동시에 작성되었다. ‘의궤’는 조선시대 국장의 진행상황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었고, 조선시대 기록 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의궤’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