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의 희망 청년 윤봉길 1편
■ 아시아의 희망 청년 윤봉길 1편
윤봉길 의사는 안중근 의사 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대표적 인물이다. 윤봉길은 어려서부터 우리 민족은 깨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농촌계몽운동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일제의 야욕이 노골화되던 1931년 24살의 윤봉길은 더욱 큰일을 하기 위해 상해로 건너가 백범 김구를 만나게 되었다.
1931년 당시 한국을 무단통치한 일본 제국주의의 다음 목표는 중국의 만주지역이었다. 이를 위해서 그들에게는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몰래 남만주지역의 철도 선로를 의도적으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 소행이라며 몰아붙이고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만주사변’ 이라고 한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932년에는 중국인을 매수해 승려를 사살하고, 이를 빌미로 중국군과 전투를 벌인 ‘상해사건’을 일으켰다.
이러한 불안한 국제 정세 속에서 윤봉길은 조국의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1933년 4월 거사를 4일 앞두고 윤봉길은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는 선서식을 했다. 선서를 마친 윤봉길은 임시정부 재무장 김구와 나란히 기념촬영을 했다. 이렇게 기념촬영을 하는 이유는 이런 거사가 단순한 개인적 충동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대한독립을 위한 노력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식사를 마친 윤봉길은 자신의 손목에 찬 시계를 풀어 백범에게 건냈다. “선생님, 이 시계는 일전에 선생님께서 주신 돈으로 산 것입니다. 저는 이제 좋은 시계가 필요치 않으니 제 시계와 바꾸시지요.” 김구의 배웅을 받으며 윤봉길은 택시에 몸을 실었다.
오전 7시 50분경, 윤봉길은 공원 안으로 들어가 미리 정해 두었던 지점에 이르러 거사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홍구공원 안은 상해 거주 일본인과 일본군은 물론이고, 각국 사절과 각계 초청자 등 2만 명이 넘는 인파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행사 식장 뒤편에는 기마 헌병이 단상을 호위했고, 그 뒤로는 수 미터의 간격을 두고 경비 병력이 이중 삼중으로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었다.
기념식장 단상 위에는 일제의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이 중앙에 자리를 잡았고, 좌우로 일제 제9사단장, 주중 공사, 주중 총영사 등 7명의 상해사변 원흉들이 착석해 있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