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의 희망 청년 윤봉길 2편
■ 아시아의 희망 청년 윤봉길 2편
윤봉길 의사는 미리 봐 두었던 뒤편 오른쪽 군중 속에 들어가 투척 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전 11시 50분 경, 윤봉길은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땅에 내려놓고 어깨에 메고 있던 수통의 폭탄 덮개를 벗기고 가죽 끈이 붙어 있는 채로 2m 가량을 전진하여 17m 정도 떨어진 중앙 단상 위로 힘껏 투척을 했다. 폭탄은 노무라와 시게미쓰의 면전에 명중하면서 폭발했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윤봉길은 재빨리 다음 폭탄을 꺼내 들었다. 자폭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안전핀을 뽑으려는 순간, 주변의 일본군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의 의거로 총사령관 시라카와는 전신에 탄편을 맞아 신음하다 결국 사망했고,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는 실명을 하였으며, 제9사단장 우에다는 다리를 절단하는 등의 치명상를 입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고통스러운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6개월에 가까운 취조와 고문으로 윤봉길의 심신은 한계를 드러냈고, 11월16일 윤봉길 의사를 태운 배는 상해를 떠나 일본 고베로 향했다.
윤봉길은 1932년 12월18일 가네자와 형무소로 옮겨졌고, 다음날인 12월19일 7시30분 무장한 헌병들이 그를 교외의 미고우시 공병작업장으로 끌고 갔다. 일본 헌병은 윤봉길의 두 팔을 십자형 기둥에 묶었고 그의 눈을 흰 천으로 가렸다. 헌병의 총탄은 윤봉길의 이마를 관통했다. 25살 청년 윤봉길의 고귀한 순절의 순간이었다. 일본군은 그의 죽음을 확인하고 그곳에서 3km 떨어진 가나자와시 공동묘지 한 모퉁이에 그를 암매장하고 봉분임을 알지 못하게 위장했다. 만약 그의 시신을 한국으로 보내게 되면 3·1운동 때처럼 분명 한국인들을 결집시키는 원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대 죄인이라도 처형 후에 유족의 요청이 있으면 인도를 하든가 그렇지 못하면 형무소 내에 적어도 묘표를 세우도록 그들의 육군형법에도 명시되어 있었지만, 윤봉길 의사의 경우는 아무도 모르게 암매장을 했던 것이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일본 패전 후 환국한 백범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도한 ‘윤봉길의사 유해 봉환단’에 의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유해발굴단은 1946년 3월2일부터 200명이 넘는 인원으로 3일 동안 작업한 끝에 모닥불을 피워놓은 묘지관리소 건물 바로 아래 길 한복판에서 그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십자가 형틀이 나오고 나무뿌리와 엉킨 유골이 발견되었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그해 5월21일 이봉창, 백정기의사의 유해와 함께 부산에 환국하여 부산공설운동장에서 합동추도식을 올리고, 같은 해 7월7일 삼의사(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국민장으로 서울 효창공원 의사묘역에 안장되었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