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4일 목요일

도산島山 안창호 1편

■ 도산島山 안창호 1편

■ 도산(島山) 안창호 1편

많은 애국지사들이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해 피땀을 흘리고 목숨을 바쳤다. 이런 독립투사들 중에서 민족의 지도자, 민족의 스승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도산 안창호이다. 도산 안창호는 확고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해 나갔던 인물이다. 나라를 잃은 슬픔과 분노에 감정적으로만 대응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방법과 이론을 체계적으로 세우고 꾸준히 실천하며 민족을 위한 비전을 제시한 지도자였다. 특히 도산이 지녔던 사상은 다른 사람의 이론이나 지식에서 모방한 것이 아닌, 도산이 직접 독립운동과 투쟁의 삶을 통해서 몸소 창조해 낸 것이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어린 시절 안창호는 16세 때까지 서당과 집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청일전쟁 당시에는 평양에서 전투가 벌어져 주민들이 피난하고 명승고적과 가옥들이 파괴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이를 지켜보며 우리 민족의 불행은 우리에게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이 무렵 기독교에 입교(入敎)했다. 도산은 기독교를 통해 서구의 자본주의를 접하게 되었고 약육강식의 논리가 세계 질서를 지배하고 있다는 현실을 배웠고, 철저한 자기비판 의식을 통해 우리 민족도 실력 양성, 즉 ‘힘’을 길러야 함을 깨달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일몰 때 우뚝 솟은 하와이 섬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감격한 도산은 이때 자신의 호를 직접 ‘도산(島山)’ 이라고 지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약 20여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100년 전 미국의 한인들은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도산은 이런 동포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학업보다는 동포들의 생활 개선지도가 더 시급함을 깨달았고, 교민신문을 발행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1907년 국내 정세가 점차 악화되자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 도산은 신민회(1907년 안창호가 만든 비밀 결사단체), 청년학우회(청년운동단체) 등을 결성하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교육, 언론, 실업, 학회 등 다양한 방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하며 군대교육과 애국교육을 실행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로 평양 마산동에 회사를 설립하고 민족 산업을 육성하여 경제 발전을 이루고자 했다.

안중근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있고 나서 도산은 일제로부터 더욱 더 경계와 감시 대상이 되었다. 이에 도산은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도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때는 1910년 8월 24일 경으로 러시아에서 한일병합 소식을 전해듣게 된다. 이는 전 세계에서 한국이란 나라가 없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러시아에 체류하는 짧은 기간 동안 도산은 러시아에 사는 한인들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러시아 당국과 교섭을 통해 한인의 권리 획득 활동을 했다. 그런데 일제는 ‘안창호는 블라디보스토크 재류 한인들의 수뇌이며, 한인들이 기획하는 모든 일들에는 안창호가 관련되었다’ 고 보고하고 그에 대한 체포에 나섰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