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산군의 여인들 거창군부인 신씨 1편
■ 연산군의 여인들 거창군부인 신씨 1편
거창군부인 신씨의 아버지는 두 번에 걸쳐 장원급제하고 현임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낸 신승선이고, 어머니는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딸 전주 이씨로, 종친세력이었다. 워낙 연산군의 악명(?)이 높다보니 왕비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도 없고, 남편을 잘못 만나 우리 역사에서 거의 존재감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왕실 유례 상 간택 없이 세자빈으로 직접 뽑힌 인물이다. 13세가 되는 1487년 3월 신씨를 세자빈으로 삼으라는 성종의 교지가 내려진 뒤 이듬해 2월 14세에 두 살 어린 세자 이융(연산군)과 결혼했다.
결혼하는 날 몹시 비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이 날의 비바람은 앞으로 순탄하지 못한 그녀의 인생을 예고한 것은 아닐까. 왕세자(王世子)로 있던 융(연산군)과 가례를 치르고 세자빈(世子嬪) 신분으로 입궁하였으며, 1494년 연산군 즉위와 함께 왕비(王妃)에 봉해졌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제인원덕왕비(齊仁元德王妃)”라는 존호를 받았으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폐비(廢妃)가 되어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강등되었다. 연산군이 쫓겨난 왕이므로 죽은 뒤 시호를 받지 못한 것과 같이 신씨 부인도 역시 시호(〇〇왕후)를 받지 못하고 그냥 ‘거창군 부인 신씨’라 불리우고 종묘에도 위패가 모셔지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신씨(愼氏)는 온순하고 근면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지는 훌륭하고 덕이 있는 인품의 소유자였다. 왕은 비록 미치고 폭정을 일삼았지만,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해주어, 연산군마저도 그녀의 덕을 높이 사고 매우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신씨는 내명부를 이끄는 왕비였으면서도 궁녀와 후궁에게 존댓말을 사용했을 정도로 순진한 성격이었다. 오죽했으면 사관들마저 "중전이 너무 답답하다."라고 한숨을 내지을 정도였다.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란하고 방종의 극치를 이루는 것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론 울며 간곡하고 절실하게 간하였다. 연산군도 그녀가 \궐내 야당\으로 직언을 해도 듣기만 할 뿐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칭찬했다. 중종반정 당시 울부짖으며 왕(연산군)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남편인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갔지만, 별다른 죄가 없는 신씨는 폐비로 강등되기만 했을 뿐, 별다른 처벌없이 외가에서 지낼 수 있었다.
연산군은 강화 교동에서 31세(1506년)로 곧 죽은 반면, 폐비 신씨는 30여년을 더 살다가 1537년에 사망하였다. 슬하에 5남 1녀를 낳았는데, 이 중 폐세자 이황, 창녕 대군(昌寧大君) 이성(李誠), 휘순 공주(徽順公主)를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두 아들마저 중종반정 때 폐서인-위리안치 과정을 거쳐 모두 사약을 받아 죽고, 휘순공주만 남았다. 다른 후궁들의 자식들도 비명횡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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