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범 김구 1편
■ 백범 김구 1편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나라의 공식 정부로서 활동을 이어 나갔다. 비록 나라의 주권은 없었으나, 조약 자체가 불법이었기에 백범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원들은 해방의 그날까지 악조건 속에서도 그 명맥을 이어갔다. 1940년, 백범은 미주 교포들이 보내준 자금으로 임시정부의 정규국군이 광복군을 창설하고 일본제국주의와 나치 독일에 대항해 선전포고를 한다.
광복군은 중국 대륙 각처에서 중국군과 함께 활동한 것을 비롯해, 1943년 8월 인도 미얀마 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여 1945년 7월까지 2년여 동안 영국군과 함께 대일항전을 전개했고, 미국의 전략첩보기구인 OSS와는 독수리작전이란 이름으로 공동작전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광복군의 참전은 자주독립을 위한 중요한 활동이었다. 드디어 미국과 함께 국내진입작전을 실행하기로 합의했으나,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이는 시작도 전에 좌절되고 말았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매우 안타까운 순간이다. 왜냐하면 전쟁에서의 패전국과 승전국은 희비가 완전히 뒤바뀌는데, 일본이 패망을 했다면 일본에 대항해 전쟁을 벌인 국가들은 승전국으로서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백범의 이런 걱정은 현실로 드러났고, 한반도는 광복 후 우리의 정부가 아닌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도선으로 경계가 나뉘어지고, 스스로 힘을 키울 때까지 미국과 소련이 통치해야 한다는 신탁통치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만약 승패를 떠나 우리의 광복군이 한반도로 진격해 일본군과 전쟁을 했다면 우리는 세계 2차 대전의 떳떳한 승전국 반열에 올랐을 것이고, 일제가 물러간 한반도에 우리의 힘으로 태극기를 꽂을 수 있었을 것이다. 1945년 8월 조국이 광복되자 백범은 서둘러 귀국하고자 하였으나, 미국은 9월7일 맥아더 사령부 포고 1호를 통해 미군정을 선포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서 귀국하기를 허용했다. 이는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목숨을 걸고 30여 년 동안 해외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애쓴 우리 정부를 부정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임시 정부 내부에서는 크게 분개하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