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1편
■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대립 1편
조선은 사대부들에 의해 성립된 국가이며,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표방하였다. 세종과 문종 대에 융성했던 유학은 세조의 무단정치와 불교 숭상으로 한 때 저조하기는 했으나, 성종 대에 이르러 경국대전이 완성됨으로써, 유교적 집권체제가 확립되었고 유교 문화는 꽃을 피웠다.
성종은 원래 학문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당시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있었던 훈구대신(개국공신들의 후예)들을 견제하기 위해, 재야에 묻혀 지내면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던 사림(조선건국에 반대했던 세력의 후예)들을 등용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지방의 사림파 맹주(盟主)로 명성이 높았던 김종직(金宗直)을 중용하였고, 뒤이어 그의 제자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 등 영남 출신의 신진들을 대거 불러들이게 되었다.
중앙에 진출한 신진 사림파들은 기성세력인 훈구파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특히 사림파들은 삼사(三司: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였고, 주자학(朱子學)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자부하면서 훈구파를 공격하였다. 즉 훈구파는 불의에 가담해 권세를 잡고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급급한 보수적 소인배라고 배척하였다. 이에 대해 훈구파는 사림들을 고고자존(孤高自尊:자신들만이 고결하다고 스스로를 높임)의 경조부박(輕佻浮薄: 언어 행동이 경솔하고 신중하지 못함)한 야심배라고 지탄하며 배격하였다.
세종대 이후 사전(私田)의 증가로 토지사유화가 과속화되면서, 기존 기득권 지배층의 사유지확대는 일반 서민의 경제생활을 압박할 뿐만 아니라, 새롭게 관리로 등용된 신진사림들의 경제생활까지도 위협하게 되었다. 관직에 올랐으나 지급받을 토지가 부족하게 된 것이었다. 기성세력인 훈구파들은 친인척들을 동원하여 벌족을 형성하고, 정권을 농단하면서 신진사림들의 진출을 막으려고 애썼다. 이렇게 현실사회의 모든 부조리를 시정하고 개혁하려는 사림파와 구질서를 고수하려는 훈구파 사이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성종이 김종직 일파의 신진사류 인사를 등용한 것은 표면적으로 유교적인 왕도정치를 펴려 한 결과이지만, 그 이면(裏面)에는 사회적 모순과 불합리성을 제거하고 시정하지 않으면 안 될 시대적 요청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종 치세 중반 이후부터 삼사(三司:사간원, 사헌부, 홍문관)를 육성해 기존의 대신을 제어하려는 성종의 정치적 계산이 현실정치에 적용된 것이었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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